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r united Mar 06. 2018

critic 불투명한 궤적 위 번뜩이는 개념을 버혀내어

조재영 작가론 (금천예술공장 및 작가 의뢰)

불투명한 궤적 위, 번뜩이는 개념을 버혀내어 



글 조주리 


 

선명하게 지루한 대신, 손에 닿을 듯 말듯 자꾸만 달아나는 언어-개념 요괴를 좇아가는.. 


작가 조재영을 만났던 날 저녁, 수첩에 이렇게 간략히만 메모해 두었다. 

이를테면, 작가에 대한 나의 짧은 인상비평이다. 조각치고는 가볍지만, 제법 단단하고 앙칼진 외형을 지닌 작업을 하는작가를 묘사하기에 어딘지 몽상적인가 싶다. 그러나 확실히 조재영은, 고전적인 조각의 범주에서 논의되기 보다 인지(perception)와 개념(conception)을 마음껏 가지고 노는 설치가, 혹은 설계가로 접근할 때 더욱 매력적이다. 


알맹이와 껍데기, 형상과 배경, 표층과 심층, 본질과 재현, 영속과 찰나, 주관과 객관, 지식과 경험. 조형미술의 세계에서, 정확히는 미술의 서사 안에서 흔하게 소환되는 개념적 짝패들이다. 언어적으로, 특히 미술의 관념 체계 위에 서 있는 이 대극의 세계는 서로 팽팽하게 힘을 겨루고, 한쪽으로 미끄러지고 어느 순간, 상호 침투한다. 좌표를 정하는 것은 작가의 일이다. 각자의 룰과 스킬로써 이 지루한 대칭의 세계를 전치시키거나, 경우에 따라  대립항의 설정 자체를 비웃는 방식으로 세계를 무화시킨다. 


 Covers         72x62x189cm, 60x50x133cm cardboard, acrylic, pedestal, 2013


조재영의 독특한 좌표 설정은, 조각 개념의 불투명함과 자기 안의 굽이치는 지적 분투를 또렷한 엣지와 매끈한 외피로 마감하는 역설적 창작술에 있는 듯 느껴진다. 두툼한 카드보드 지 위로 투명하게 드러난 제도 선과 절개 면의 이음 처리는 건축적 명료함과 공예적 손맛이 쟁명하는 듯, 개운하고 세련됐다. 문학적인 함의를 덧댄 제목들과 달리, 그의 작업들은 차갑게 정련되고, 공간 속에서 감각적으로 배치된다. 그 내부에, 세상에 대한 구체적인 암시나 사건에 대한 친절한 각주는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수학적 시선으로 계측된 형태들을 재 창안하고, 그것들을 다시 접합, 증식시켜 나가는 일관된 원칙을 디자인 해나가는 일이야 말로 작가의 오롯한 몫이다.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는 원형질을 도려내어 윤곽을 만들어 준다거나, 피그말리온이 그랬던 것처럼 형태의 삶을 차오르게 하는 예술적 수행과는 다른 종류의 지적투쟁이자 생산과정이다. 



Sculptures in the blankcardboard, contact paper, moved objects from artist's studio_2013



필요한 것은 미술적인 공간으로 합의된 특정한 장소성을 위해 존재한다거나 작품과 작품 사이의 논리적 배열 혹은 전체와 부분의 위계를세우는 것으로부터 빠져나와, 어제의 개념과 지금의 신체적 경험이 서로를 배반하고 충돌하게 하는 작가적 세팅을 하는 것. 따라서 조재영이 디자인한 사물들로 배열된 세계의 자장 안에서는, 언제나 부분의 합이 전체를 넘어서고, 텅 빈 것처럼 보인 내부는 눅진한 레이어로 꽉 차 있고, 익숙하게 보아왔던 사물의 실루엣은 별안간 생경해진다.  


Through Another Way, 60x310x230cm_cardboard, wood_2014


언제나 변화하는 관계적 상황 속에서만 의미를 진동시키는 개념과 인지 체계, 그것을 표층에서 전송하고 수신하는 언어의 궤적. 그 위에서의 작가의 행로는 언제나 불투명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 궤적 위의 한 허리를, 한 순간을 버혀내는(베어내는) 창작의 단면 만큼은 언제나 또렷하게 결정화되어,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리고 이내, 조재영이 상황 속에서 버혀낸 사물의 조각들, 때에 따라서는 조각적 사물들은 장소와 맥락이 달라진 가운데 서리서리 놓였다가, 구비구비 펼쳐지면서 매번 새로운 불투명함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Andro’s Nine Seoulic Moulds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