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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Apr 11. 2018

on a starting point

전시기획 단계에서의 아이디어 노트 

전시의 시작점, 기억나지 않는 대과거 더듬기 



전시제안 조주리


요컨대, <베틀, 배틀>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가을부터 진행해 왔던 나의 (출판과 전시 등 타인과 공유되는 플랫폼으로 귀결될 것을 전제로 한) 리서치는 오스트리아 기반의 아티스트 이네스 도우약(Ines Doujak)이 2010년부터 지속해 온 직물의 식민화 과정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 Loomshuttles/Warpaths(베틀북/진격로)와 출판물 시리즈 Eccentric Archive(기괴한 아카이브)와 Dirty Secret(더러운 비밀 시리즈), 가장 최근의 기획전 Not dressed for Conquering (정복을 위해 옷을 입지는 않는다, 뷔템베르기셔 쿤스트페어라인 슈트트가르트 초청전시)으로 연결되는 한 개인의 집념 어린 연구 궤적으로부터 촉발된 2차 연구-기획에 가깝다.  


Ines Doujak, Loomshuttles, Warpaths (2010-2018). A beast, a god, and a line, Dhaka Art Summit 2018


그러나 연구가 발전하여 전시로 이행하게 된다면, 그것은 새롭게 재편된 흐름과 형태, 방법론을 취할 것이고, 이네스는 다수의 초청 작가 중의 한 명으로서 신작을 발전시킬 테고, 새롭게 구성된 집단- 작가와 연구자들은 또 다른 예각에서 각자의 이야기와 이미지를 펼쳐 낼테다.   


동남아시아 직물과 의복을 다룬 다분히 외교적 지향의 의복 전시(aka, ‘화혼지정’, 2017 아세안문화원 개원특별전)를 준비하던 지난 여름과 가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던 이네스의 작업들이 불현듯 생각났다. 좌대 위로 공인된 캡션을 올려두는 것 외에 모든 구체적 맥락을 탈각시키고야 마는, 사실상의 유물 전시를 수행하다 보면 기획-창작에 대한 갈급함이 솟기 마련이다. 금사를 짜 넣어 기하학적으로 직조한 송켓이나 바틱 천으로 지어진 이국의 아름다운 혼례복을 마네킹 바디에 입히면서, 화려한 레이스와 자수로 장식된 베네치아 공국의 벨벳 드레스,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곱디고운 모시 길쌈의 풍경, 캄보디아에 공장을 둔 자라의 남미풍 튜닉 원피스 따위를 떠올린다. 


기실, 옷 뒤에 어려있는 무명의 존재들. 즉, 누에를 치는 사람들, 베틀 북을 움직이는 바쁜 손길, 어린 염색공과 자수 놓는 소녀들, 그리고 대체로 괴물로 묘사되는 공장장/작업 반장, 방화범, 좁은 작업실에 갇혀 불타 죽은 소녀들. 일생의례 중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복식인 혼례복을 눈 앞에 두고, 나는 실과 천, 옷과 패션에 대한 서늘하고 갑갑증 나는, 매캐한 상상들을 해보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경성 방직 공장과 여공의 모습


<Not dressed for Conquering>, 원 전시의 제목이 갖는 함의를 알아채기란 고약하다. 


천과 옷으로 구성된 전시였음이 분명한데, 옷을 입지 않고 빈둥대는 라틴 산중의 베가본드들을 지시하는 역설적 레토릭이다. 작가는 스페인사람도, 남미 사람도 아닌 오스트리아인인데, 그래서인지 백인 좌파 지식인 답게 콜로니얼리즘, 글로벌화 된 현재에도 끊임없이 형태를 바꿔가며 잔존하는 노예 시장과 극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부채 의식을 바탕으로, 일종의 정치적 올바름을 수호하는 분처럼 상상되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면 찬탄으로 남았을 터. 전시장을 뒤덮은 패션 오브제들의 기이하고 공격적인 에너지는, 일종의 전투적 선언에 가깝다. 핏방울 도트 무늬의 우산과 화려한 화염 문양의 셔츠는 멀리서 보면 알렉산더 맥퀸이나 베르사체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노동의 사슬들, 죽음과 부패, 환각과 질식의 무늬. 그 자체다.    


나는 타임라인도, 지정학적 상황도, 기획 의도도 사정없이 빗겨간 두 전시의 중간지점에서 엉뚱한 줄-긋기를 시도해 보기로 한다.


앞서의 작가 연구/창작이 주로 스페인와 남미 대륙사이에서 전개된 식민화 과정에 닻을 내린 것이었다면, 나는 좀더 우리 내부의 이야기를 좀 더 들추고 싶고, 비-언어적인 방식, 즉 패브릭으로, 자수로, 옷으로 응수하고 발언하고 싶다. 일제에 의한 식민의 대상에서 해방 이후 자국민을 대상으로 경제 노예화를 실시했던 내부의 폐허-풍경을, 나아가 국경 너머 동남 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또 다른 착취의 구조로 연결되는 반복되는 악몽의 서사 같은 것.  


100억불 수출의 날, 1977년 12월 22일 하오 4시, 대한민국 수출실적이 100억 달러를 돌파


한편, 전시의 형식에 대한 반복되는 고민과 모색은 새 전시를 고민하게 된 또 하나의 촉발점이기도 하다. 동시대 미술 전시라고 해도 여전히 공예, 직물, 패션을 다루는 전시는 여전히 소재주의 혹은 제한된 방식의 디스플레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 안에 어떠한 입체적인 학제적 연구가 개입될 토대가 부족하다. 반면 인문, 사회과학적 지식 기반에서 출발한 전시 역시 그 평면성과 교조주의의 한계를 넘기가 수월치 않다.  


그래서 어쩌면  패션 전시, 공예 전시, 아카이브 전시, 혹은 아시아성을 편집적으로 구성하려 드는 전시의 전형성들을 모조리 비껴가는 어떤, 중간 지대의 전시 모델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서 출발해 본다. 리서치에서 건져 올린 자료들과 통찰은 압축되고 압축되어 한 장의 페이퍼로 쪼그라들고, 결국 후면으로 사라질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들은 작품 속의 단서나 근거로 소환될 것이고, 오브제 표층의 무늬로서 서사를 다하고, 이미지의 삶을 마칠 것이다.  


겨울이 끝나기 전 해야할 일들이란-


1) 방대한 자료를 알맞은 사이즈로 가공하고, 독자적 프레임으로 배열하고, 광범위한 레퍼런스 속에서 길어올린 말과 이미지를 조탁하여 창작-출판물과 미술 전시로 발전시켜 나갈 동료 기획자와 연구자들을 찾아내는 일, 2) 전시의 기획의도와 운영 방식에 공감하며 작가적 해석과 통찰력, 예술적 방법론으로 작품을 생산해 낼 작가들을 청해 뵙고 불투명한 앞 일을 제안하는 일, 

3) 무엇보다 연구자의 지식 생산과 창작자들의 작품 창작이 연결되는 지점에 대한 포석을 이리저리 옮겨 보는 일.



*2017년 여름, 이렇게 첫 출발한 전시는 현재 운 좋게 순항 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측로부터의 사전 리서치 기금을 받아 비엔나에 소재한 작가의 스튜디오 비짓을 할 수 있었고, 하반기 동안, 동료로 함께 할 리서처 그룹과 제작자 그룹을 발굴하고 설득하고, 우격다짐으로 팀-업을 해왔다. 무엇보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함께할 작가 동료 아홉팀을 구성하는 일. 자잘한 변화들은 있었지만, 큰 그림에는 흔들림 없이 달려 왔다. 아이디어는 개인의 조사연구로, 다시 전시를 중간지대로 하는 집단연구와 출판 프로젝트, 작가들과 디자이너가 가세한 신작 프로덕션으로 점점 확장되며 지루함과 긴급함을 반복하며 어쨌거나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올해 3월이 끝나갈 무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산하 창작산실 전시기획사업으로 최종 선정되어 8월, 토탈미술관에서의 전시를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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