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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Jan 10. 2019

일일 드라마, Later Lady

 Leire Urbeltz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2018 국외 입주작

일일 드라마, Later Lady


글 조주리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팜플로나(Pamplona) 출신으로, 빌바오에서 이곳 서울에 온 작가 레이레 우르벨츠(Leire Urbeltz).  


그녀에게 난지는 이전에 중국과 미국에서의 일시적 정주를 경험한 후 선택한, 세 번째 즈음의 레지던스일 것이다. 레이레는 주로 해당 지역에 대한 밀도 있는 문화연구와 참여관찰, 규칙적인 시각적 기록,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일러스트와 설치의 형태로 옮기는 방식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일종의 문화적 번안인 셈이다.


그녀의 작업에 통상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규정되는 장르의 특질들이 설핏 스쳐간다. 가령, 특정한 풍경과 대상에 대한 재현과 상상의 서사를 품은 듯한 인간적인 필치, 팝적인 색채와 명료한 선, 의도된 키치적 미감과 동화적 서정이 조금 그렇게 느껴진다. 그 모든 요소들이 아름답게 뒤엉킨 일련의 드로잉, 회화, 설치작업은 차갑거나 잘난 척 하는 데 없이, 사람의 시선을 쏘옥 끌어당긴다. 보는 이를 경직 시키지 않고, 읽어 보게끔 유도하는 시각 체계이다. 나에게는 그녀가 창안해 낸 이미지들의 세계와 체계가 ‘어렵게 만들어진 쉬움’, ‘농밀한 시간들이 겹쳐보이는 피상’이라고 이해된다. 


작가의 발랄한 지성에 깃든 풍부한 독서 의 이력과 성실한 문화연구, 낯선 현장에서 이방인이 연결해낼 수 있는 선험과 통찰은 아마도 문화연구자-시각적 번안가로서의 이중적 역할을 수행하는 레이레의 중요한 자산일 것이다. 비평가 대 작가의 구도가 아닌, 몇 달간의 스튜디오 친구로서 느꼈던 점이기도 하다. 때문에, 일러스트레이터로써 이미 탁월해-왔었지만, 말 만들기를 즐기는 나로서는 그 보다 좀더 적확하며 풍부한 수식에의 갈급과 욕망이 샘솟는다. 이전의 작업에서 ‘확장된 일러스트레이션’(Expanded Illustration)이라는 말을 작가 스스로가 사용한 적이 있는데, 확장의 너비와 깊이가 어디까지 인지는 좀더 두고 보며, 적절한 수사를 제안할 때를 가늠해 본다.  

Images from Leire's Drawing Book found on her SNS


한편, 레이레의 작업물이 지닌 혼성적 아름다움, 여성적 감성, 잔잔한 위트와 만났을 때 그것들이 호출해 낸 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십대 후반 사춘기 청소년의 정서이다. 별안간, 관객으로서 그런 느낌을 부여 받았다. 레이레가 이곳에서 주로 관심을 기울이며 묘사하고, 기록한 것들이 K-pop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대중문화와 아이돌 문화라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녀가 제주여행에서 만난 나이든 해녀의 모습, 서구권 작가들이라면 한번쯤 경험하기를 소원하는 깊은 산사에서의 템플스테이, 가짜 한복을 입은 외국인 관광객과 유투버들이 셀피를 찍고 돌아다니는 인사동 유람을 통해 레이레가 간파해 낸 아말감같은 당대의 풍광들, 문화적 자신감과 열등감, 집단적 일체감과 인간 소외가 발맞추어 증식하는 이 도시의 씁쓸한 단편들. 


Leire Urbeltz,  <Wifi zone>, Paper petaIs and guache paint on hanji, 2018


지금의 나는 작가의 말과 이미지에 숨겨둔 레이어를 간파해 내고, 후면에서 작동해온 작업의 이력을 읽어내는 갓 사십줄에 접어든 지식노동자가 되어 있는데, 어쩐지 레이레의 작업 앞에서만큼은 소년의 민트 컬러 머릿결에 집중하고, 보라색 펜촉을 따라 흘러내리는 작가’언니’의 감성에 입덕하고, 충성하고파 진다.  


Images from  www.instagram.com/leireurbeltz/

새로운 섬을 탐사하는 인류학자의 기록노트처럼, 차분하면서도 어딘가 드라마틱한 매일 매일의 기록을 나는 주로 작가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 하며 챙겨보게 된다. 만화잡지 ‘윙크’를 손꼽아 기다리던 사춘기 아이처럼, 일일 연속극을 챙겨보는 중년의 나처럼. 어쩌면 변화의 속도가 이곳보다는 슬쩍 더딘 곳에서 온 레이레의 작업 속에 고스란히 내비쳐진 관찰자의 흔들리는 시선들, 아찔한 현기증 속에 순정 만화가 예술 만화로 이행되는 즐거움을 느꼈지 않았을까.  그녀가 서울을 떠난 후에도 가끔씩 레이레의 SNS를, 정확히는 그곳에 기록된 매일의 이미지들을 살펴보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근황과 관심사에 대해서 유추하게 된다. 레이레의 일일 드라마는 늘 쉼없이 잔잔히 이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미지의 삶은 놀라운 데가 있어서, 얼마 전 서울의 한 신생공간에서 그녀의 작업과 조우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시적으로 서울에 머물렀지만, 그녀가 펼쳐 낸 드로잉과 일러스트 작업 속에서 자주 만나던 소년의 이미지는 다시 네온사인으로 돌아와 방긋 인사했고, 작업실에서 한복을 갖고 자유롭게 놀던 작가답게, 해녀복에서 승복까지 한국에서 관찰했던 옷들의 이미지는 귀여운 스티커 굿즈로 변신하여 전시실에 놓여 있었다. 아마도 스페인, 혹은 다른 이국의 도시를 돌며 이 이미지들은 여러 포멧의 형태에 실려 각자의 여행을 해 나갈 것 이다.  

   

여담이지만, 일종의 별명이라 할 수 있는 ‘레이터 레이디’는 바스크식 이름인 ‘레이레’가 영어 식으로 발음되면서 비슷한 어감의 두 단어 ‘레이터’ (later) ‘레이디’(lady)로 엉뚱하게 번안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래서, 나는 숙녀 레이레를 ‘다시 만날’ 혹은 ‘나중에 올’ 자별한 십대 친구처럼, 손꼽아 기다릴 만화 잡지처럼, 조금씩 시나리오가 바뀌는 일일 드라마처럼 기다린다.      




A Daily Soap Opera, Later Lady


Written by Juri CHO 


* English text will be updated very soon upon revising minor expres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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