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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Mar 06. 2019

붉은 기억술

아르코미술관 <Unclosed Bricks: 기억의 틈> 도록 기고문

붉은 기억술



글 조주리



전시는 ‘기억술’의 한 지류이다.


동시대에 선보여진, 혹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인 대다수의 미술 전시들을 떠올려 본다면 전시만들기의 궁리와 실천이라는 것이 대체로 대과거로부터 출발하여 현재 직전에 겨우 당도해 있음이 분명하다. 작가들의 작업 안에서라면 미래가 곧 현재라고 선언한다거나, 과거야말로 오래된 미래라고 말한다 해도 어색함은 없다. 그러나 전시의 착상과 이후의 전개는 늘 흐릿한 과거로부터 자잘한 단서들을 채취해 와서 지금의 타임라인 속에 슬며시 풀어놓고 욱여넣는 과정 속에서 가능하다. 다만, 전시가 일반의 기억술 즉, 기록의 책무를 띤 일련의 기억 투쟁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 특정한 대상에의 회고와 기념에 복무하는 시청각적 재현이 아닌 합의된 기억과 재생 방식에 균열을 가하고 틈입하는 전략에 있다. 제도적 기억에 대한 반 기억, 자연화된 문화에 대한 탈 역사적 태도는 전시가 구사하는 예술적 기억술의 특징적인 면면이기도 하다. 미술전시 장르가 갖는 개념적인 추상성과 표현적인 핍진성의 양면적 대치는 많은 기획전시에서 지나간 역사가 현재적 쟁점으로 소비되는 특수한 지점들을 제공하기도 한다.


기억술(Mnemonics)이란

회상을 돕는 모든 장치를 일컫는다.

[1]


고대에는 일종의 수사학이었고 오랜 동안 유사 과학에 가까운 측면이 있었지만, 현대 정보처리학과 인지심리 분야에서는 무엇보다 효율적인 기억 관리의 전략들을 지시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단어의 용례들과 무관하게, 전시를 일종의 기억술로 명명한 까닭은 퍽 단순하다. 기억술은 대체적으로 장소의 기억과 연합되기 때문이다. 가장 널리 쓰이는 기법 중 ‘기억의 궁전’이 바로 장소 기반의 기억술인데, 실재하는 장소 혹은 가공의 장소 속에 기억하고 싶은 대상을 조작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이다. 기억을 찾을 때에도 각자가 구축한 공간 질서에 진입함으로써 가능하다. 선택적인 기억의 대상들은 그 안에서 추상화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정밀하게 묘사되고, 때때로 전혀 다른 이미지들로 치환되고, 그 안에서 조작, 은폐, 망각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순전한 방식의 ‘저장’, 그에 대칭되는 출력값으로서의 ‘회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과 역사, 둘 사이의 기억 테제를 다루는 모든 종류의 미학적 실천에서 창작자들이 선택적으로 배치한 공간의 표상들, 기억과 공간을 매개하는 매체의 적용과 확장, 동떨어진 시간과 장소를 임의적으로 이어붙이는 편집술은 역사 기술을 예술적 서사로 전환시키는 기억술로서 작동하게 된다.



몇 가지 관전의 선이 있다.


전시 <Unclosed Bricks; 기억의 틈> 역시 보편의 공간 기억을 예술적으로 제유해내는 프레임으로 다가온다. 전시공간에 들어선 관람객으로서 전제하고 있는 가설과 기대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전시가 갖는 주제적 응집력이나 각 작업들이 서로 집합을 이루고 아귀를 맞춤으로써 성취해낸 예술적 탁월함에 대한 평가와는 다른 위상이다. 전시를 일종의 기억술로써 규정한 앞서의 정의에 따라, 이들 각 주체들을 일종의 기억술사로 본다면, 이들은 어떠한 전략을 통해 그들에게 작업의 대상지로서 부여된 이 곳을 말하고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일까. 바로 그러한 궁금증이다.

현재의 아르코미술관과 주변 건축들이 이루는 시각적 경관에 얽혀있는 장소성, 나아가 도시 역사를 압축적으로 표상해 내는 ‘붉은 벽돌 한 장’. 이 단순 명료한 조건으로부터 시작한 이번 전시에서 전시의 여러 주체들은 공동의 탐색가로 출발하여, 결론부에 이르러서는 아마도 독자적 저자로 이행했을 테다. 그러므로, 전시를 관람하는 일은 이들의 기억 궁전 안으로 편입되는 과정이다.  또한 전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대로 합일된 장소 기억과 총체성에 기여하지 않는, 따라서 보편의 역사에서 탈각되고 은폐된 어떤 틈과 결절지점을 발견하고 그 사이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한편, 기획자나 참여 작가들이 속한 세대를 가늠해 본다면, 실제로는 제국의 시대와 해방 전후, 유신 시대를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후속 세대의 히스토리 보이(History Boys)들이다. 이 경우, 구체적인 경험과 탐색의 결과로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개인의 장소감이라는 것이 전시 생산자에 의해 어떻게 재맥락화 되는지, 개별 작품들이 모여 전체적으로 어떠한 심리적 경관을 구성하게 되는지 또한 또 다른 관람의 축이 된다.  


아르코미술관 1F 입구 전경 <Unclosed Bricks: 기억의 틈>



공간은 기억을, 기억 또한 공간을 배반한다.


저마다 붙들려 있는 기억의 편린들을 합의된 장소 안으로 불러 들이고 재생해 내는 전시는 최소 서너 레이어로 지어진 다겹의 기억구성체이다. 전시가 다루고 있는 어느 것 하나 지난 역사와 사회, 문화적 기억과 무관한 것은 없다. 때때로 그 기억들은 학습된 것, 오인된 것, 훔쳐낸 것, 그리고 상상된 어떤 것일 수 있다. 그 때문에 전시는 통합된 풍경이기보다 개인들이 기억하는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무수한 분열선들이 파생되는 터로써 다가온다. 전시의 활자 정보들이 전달하는 뉘앙스로부터 건실한 건축 전시나 연구 기반의 아카이브전의 풍모를 예상하는 이들도 더러 있겠지만, 전시는 연약하고 변화무쌍한 심상 지리에 가깝다. 미술관의 1,2층을 따라 분절되고 그 안에서 구획된 동선을 따라 걷다 보면, 공간과 기억에 대한 각자의 해석의 폭과 입장이 요동치는 기묘한 지층부와 작품과 작품 사이 휘어지고 끊어진 층리들을 목격하게 된다.

기실, 공간은 기억을 다 담지 못하고, 기억 또한 공간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어느 역사학자의 지적처럼, 공간이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그 안에 기억을 축적해 낸다는 믿음은 더 이상 우리시대의 일반적 체험에 합치되지 않는다. 과학철학자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찬미했던 “지속성의 화석 아니라 우리네 일상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변화의 촉매제로 기능한다. 공간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오직 구체적인 경험의 촉매이자  결과로서 의미화된다. 특정한 기억과 관념, 이데올로기에 의해 여타 공간들과 차이를 갖게 됨으로써 비로소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얻는다. [2] 전시 <Unclosed Bricks; 기억의 틈>에서 작가들의 실천과 시도들 역시 이러한 탈 역사적인 기억술의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역사와 개인, 추상과 구체, 변화와 지속의 굴레를 질문한다.


조금 더 구조적으로 작업에 내재된 기억술의 면모를 해체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소재적인 측면에서 전시의 촉발점이기도 했던 ‘벽돌’ 그 자체에 대해서  ㅋㅋㄹㅋㄷㅋ과 김민애 작가는 제시된 소재를 정면에서 돌파해 나간 것처럼 보인다. 건축물의 하부 구조나 반복되는 모듈 속에 공간과 도시의 기억이 누적되어 있다고 하는 믿음은 누군가에는 지나치게 순진한 접근일 수 있다.  그러나 사진적 스케일의 확대와 평면성의 강조, 핍진성이 의도적으로 제거된 것처럼 보이는 대형 프린트물의 내부 부착으로 인해 오히려 탈역사적인 논조를 전달한다.


김도균 작가의 건축사진
김민애, <클립>, 아르코미술관, 2018

가장 고전적인 건축 자재 중 하나인 벽돌의 형질과 물성을 묘하게 해체해 버리는 김민애의 <클립> 설치 방식과 산업적 미감은 어쩌면 지나치게 역사성을 강조할 수 있는 전시의 흐름을 작가적인 기지로 슬쩍 바꾸어 놓은 장치가 된다. 총체적 조망이 아닌 파편적 요소들을 확대하고 엉뚱하게 잘라내고, 기묘하게 조립하는 방식은 여러 작가들이 기저에서 공유하는 특징이기는 하다. 다만 건축(을 재생하는)-미술과 미술-(이 미메시스 해낸) 건축이 다를 수 있다면, 이 지점에서 좌표를 정할 있을 것 같다. 두 경우 기억의 게슈탈트가 전혀 달라질 수 있음은 당연하다.


바로 그런 점에서 작가 강서경의 작업 <높은, 자리, 정> 공간을 드문드문 점유하는 방식, 관객의 직접적 몰입을 막아서는 그 불편함으로 인해 당위를 얻게 된다. 벽돌이나 장소에 대한 사실적 재현과 재생으로부터 확연히 멀어진 이 작업이 가진 매력은 관람객이 작업의 배열 속에서 자신의 신체를 이동시키며 공간의 궤적을 가상적으로 이어보게 하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자리’로 지시되는 각각의 다른 위치, 면적, 서 있거나 누워있는 방식은 건축적 텍토닉과 연결 짓게 한다. 조적식 구조인 미술관 건축 안에 다시 일종의 ‘짓고 잇는’ 시적인 풍경을 배치함으로 인해 개념적인 내, 외겹이 생겨난다. 기본적 대칭감각과 연속, 반복되는 프랙탈의 구조가 건축의 보편적 외연이라면, 매번 다른 조합과 변주가 가능한 강서경의 작은 플랫폼들은 그와 다른 리듬으로 접합되는 예술적 모듈러가 된다.     


전시전경, 1F , 아르코미술관, 2018
전소정, <텔레포트는 폐쇄회로를 살해하였는가>, 아르코미술관, 2018

전소정의 작업 <텔레포트는 폐쇄회로를 살해하였는가>는 강렬한 통각과 온몸에 침투되는 현기증의 감각들로 체현된다. 문인이자 건축가, 그 이상의 다중적 정체성을 지녔던 예술가 이상의 태그를 분명히 내건 작업이다. 위에서 아래, 수직으로 흐르는 종로 지역의 CCVT 화면에 나직한 톤의 보이스오버와 힙합 사운드가 스웩 넘치게 덧입혀진 전소정의 영상 역시 근본적으로는 과거의 인물로부터 현재를 살아가는 작가 자신을 경유하는 공간에 관한 탈 역사적 서사로 다가온다. 근대에 새롭게 출현한, 불가해한 시각성이 이상에 의해 추상적 부호들로 환원되었던 것처럼, 작가는 같은 자리에서 다른 시간을 왕복 유영하며 역사와 개인, 추상과 구체, 변화와 지속의 굴레를 질문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시공간으로의 텔레포트적 접속은 상실된 장소 안에서 방황하는 자아를 대변하듯 지직거리며 선회한다. 상호협응이 되지 않는 인지적 자극들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전소정의 작업을 통해 비로소 이 전시가 갖는 기묘한 비기념비적인 분위기들을 점차 확증해 나가게 된다.


조금 더 생생한 시청각적인 단면과 지층을 통해 벽돌 건축과 도시 공간의 접면에서 역사적 기억들과 삶의 특수한 풍경을 다루는 작업들이 2층으로 이어진다. 김영은 작업 <붉은 소음의 방문>은 권위주의 정치 체제 하에서의 소리 정치와 그것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붉은 벽돌 망루로 대변되는 억압적 건축에 대한 옛 기억을 건드린다. 작가가 ‘붉은 소음’으로 규정한 다양한 청각적 시그널과 시대의 소리들은 물리적 시공의 진폭을 크게 확장시킨다. 일반적으로 대학로의 경관을 이루는 벽돌 건축들이 낭만적인 정취를 자극한다면, 김영은의 붉은 소음을 통해 역방향으로 상상해본 전후의 건축들로부터는 명백히 파시스트적인 공포의 여운들을 온몸으로, 그 퍼런 서늘함을 실감하게 한다.


김영은, <붉은 소음의 방문>, 아르코미술관, 2018

김수근의 건축을 포함한 대학로의 상징적 벽돌 건축물들을 배경으로 한 권혜원의 <우리는 어딘가에 있다>는 다른 지점들로 경유하지 않고 곧장 공간 내부로 진입한다. 위아래로 덜컹거리는 화면은 어쩌면 정전화된 장소가 갖는 요동치는 정체성과 그곳에 서린 기억의 불안정함과 오류를 고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미 한 동안 도심지로서의 쇠락과 개발이 반복적으로 전개되어 온 대학로 내부에 침투한 상업주의와 투어리즘이 지금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이라면, 작가가 담아내는 유동하는 장소의 기록들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대과거부터 누적되어온 파국과 망각의 더께를 흔들어대는 듯 하다.


ㅋㅋㄹㅋㄷㅋ, <ub.ssd.t>, 아르코미술관, 2018

1층에 이어, ㅋㅋㄹㅋㄷㅋ는 <ub.ssd.t> 작업을 통해 성수동 일대의 건축적 집성과 분화 과정의 레이어들을 좀더 실증적인 조사와 시각화로써 전달해낸다. 주로 공장건물로 기능했던 성수동 일대의 벽돌건축들은 이제 노스탤지어와 결합된 투어리즘의 대상으로, 도시개발의 새로운 예정지로 새로운 위상을 획득하고 있는 과정에 놓여 있다. 지도는 정해진 축적율 안에서 공간적, 시계열적 데이터를 객관적 양태로 전달할 수 있는 매체이지만 동시에 가장 강조하고 싶은 정보만을 편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작업 포멧이기도 하다.



11월, 붉은 기억술 


결과적으로 작가들이 전시를 통해 구체적으로 되살리고, 추상적으로 은유하고, 예술적으로 매개해 낸 기억의 실천과 투쟁은 이른바 예술적 사유와 상상에 가까운 것들이다. 집단적 추념보다는 망실된 기억에 대한 개인적 서사들에 무게 추가 실린 전시란 어떤 발언을 해낼 수 있는 것일까. 외견상 40주년을 맞는 기관의 역사를 기념하는 해에 맞춰 준비된 이번 전시는 공간과 기억에 관하여 도통 선명한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공간과 기억 사이에서 분열된 질문들을 유발한다.


지금의 자리에 아르코미술관(과거 문예회관)이 완공된 해에 태어났다는 점에서 나 역시 이 공간의 연혁과 비슷한 햇수를 지나온 셈이다. 성인이 되어서야 처음 마로니에 공원과 김수근의 건축 유산과 대면한 나에게 이곳에 대한 어떤 농밀한 기억이나 장소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후 꽤 오랜동안 이곳에서 참으로 많은 전시를 보았고, 이 일대를 오가며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쳤고, 더러는 잠시 잠깐 생업의 터전으로 삼아 오기도 하면서 이 주변의 공간이 더이상 역사 기록과 타인의 해석을 통해 학습했던 공간이 아닌 내면의 심층부에 진득한 기억으로 내려 앉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이전의 전시들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이번 전시를 통해 내가 살아내지 못했던 시간과 공간을 더듬어 보게 되고, 시선을 두지 않았던 건축과 도시 경관의 이면들을 상상해 보게 된다. 재료적 맥락을 따라 가다, 작가들이 섬세하게 마련해 둔 기억 통로들을 따라가다 어느 순간 사람, 지역, 사회, 역사로 확장되는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벽돌의 색이 전하는 물리적 심상은 지난 날 뜨겁도록 분주했던 내 과거에의 기억, 그리고 전시에서 조우한 풍경들과 밀착되어 다시금 나의 기억 궁전 안에서 붉게 착색된다.


          


[1] 기억술(記憶術, mnemonic)은 정보의 기억을 위한 방법으로, 특히 숫자의 나열처럼 직관적인 관계가 없어 외우기 어려운 정보에 다른 정보를 연결하여 외우기 쉽도록 하는 데 쓰인다. 대표적인 예로 리듬을 가진 노래를 만들어 외우거나, 생일과 같이 자기와 깊게 관련된 정보로부터 연상을 하는 것이 있다. 서양에서 기억술은 2500년전 고대 그리스 시인이자 철학자인 시모니데스를 개조로 하다. 기억술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니모닉(mnemonic)은 기억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니모니코스(μνημονικός)에서 파생되었으며, 이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기억술은 중세 유럽에까지 전수되어, 주로 수도자나 신학자들이 만은 저술의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 사용하곤 해다. 종이와 인쇄술이 귀했던 시대에 기억력을 기르는 것은 교양인의 필수 조건이었다. (설명 참조: 위키피디아)


[2] 역사학자 전진성과의 대화와 미발표 비평문에서 인용, 2018년 10월 19일




* 사진출처: 아르코미술관 홈페이지 및 보도자료

   -본 텍스트 아르코미술관 설립 40주년 기념전 <Unclosed Bricks:기억의 틈> 도록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시: 2018.10.12- 12.02,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1,2 F

   -기획: 아르코미술관 이영주 큐레이터 (협력: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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