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기게, 끈질긴>은 세계적인 코미디 배우이자, 뮤지션, 성우 그 밖에 다양한 일을 수행하는 대중문화계의 N잡러, 잭 블랙(Jack Black)을 한 중심에 둔 전시이다. 전시를 제안한 기획자에게나 참여한 작가들에게 이번 전시는 전시이기도 하고, 퍼포먼스일 수도 있고, 최종 결과물일 수도 있고, 이제서야 무언가를 시작해 보려는 출사표와도 같은 그런 순간 일 수 있다. 미술가들이 모여 만든 그다지 미술적이지 않은 전시의 외양으로 비춰질 법도 하다. 애초에 헌정의 의도로 출발한 트리뷰트 쇼이지만 전시를 공개하면서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일부를 노출해야 하는, 이른바 소심한 관종들의 전시가 되버렸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 처럼, 전시의 제목은 잭 블랙이 그의 오랜 음악적 동반자인 카일 개스(Kyle Gass)와 1994년 첫 결성하여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 중인 록 듀오 "터네이셔스 디"(Tenacious D)로 부터 온 것이다. 영어로, "끈질긴"이라는 의미가 있는 밴드명은 이해불가하면도 충분히 납득할만 하다. 밴드를 만들기로 결심한 후 공식적으로 첫 앨범이 나온 것은 그로부터 거의 10년 뒤였고, 두 사람의 밴드는 드문드문이지만 꾸준한 주기로 앨범을 발표해 왔다.
이들의 음악에는 정통 하드록과 헤비메탈, 컨트리, 코미디 록적 요소가 두루 개입되어 있다. 나아가 하드 록의 코드들을 메타 수행하고 전설적 뮤지션들을 트리뷰트함으로써 그것이 미국의 록 유산에 대한 "리스펙트"인지 예능적 "디스"인지를 종종 헷갈리게 한다. 아마 둘 다거나, 존경을 담은 놀림일지도 모르겠다. 터네이셔스 디는 작년 말에 신보 "포스트-아포칼립토(Post-Apocalypto)"와 함께 잭 블랙이 손수 드로잉을 한 것으로 알려진 다섯 편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유투브를 통해 전격 발표했고, 올해 전 유럽과 전미 투어를 진행 중이다.
대중적으로 가장 크게 흥행한 "스쿨 오브 록" 이전부터 단역으로 출연한"사랑도 리콜이 되나요?(High Fidelity)" 와 터네이셔스 디의 탄생을 자전적으로 묘사한 "운명의 피크(The Pick of Destiny)" 등은 수없이 많이 언급된 잭 블랙 표 음악영화의 계보를 이룬다. 다양한 캐릭터들 유독, 뚱보, 게으름뱅이, 무뢰한, 괴짜 등 주로 루저의 모습으로 자주 분했던 영화 속 잭 블랙의 모습과 진지-코믹- 불량을 오가는 록 음악 특유의 서사와 게임적 세계관 속에서 우리는 그와 함께 억눌린 자아을 찾아가는 분투기를 관망하다 어느덧 저 멀리 있는 악당들과 싸우러 떠나는 험난한 여정에 함께 동참하게 된다. 그 과정들은 대개 충동적이며, 무리수고, 여지없이 고생바가지다.
한편, 평생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캘리포니아를 떠나는 법이 없이 누구보다도 성실한 가정을 이루었고, 놀라울 정도로 새롭고 다양한 역할들을 온몸으로 실천해 내는 잭 블랙으로부터 알 수 없는 신뢰감과 애정을 느낀다. 스크린과 앨범, 게임 속 캐릭터 그리고 진짜 토마스 제이콥 잭 블랙, 제이블, JB, 쟈블린스키 모두 "게으르지만 결국엔 뭔가를 해내고, 무리수를 두지만 그래도 응원하는 재미가 있고, 무례해 보이지만 할 말은 하는 선량한 마음이었을"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는 실존하는 꿀잼 캐릭터로부터 스스로의 일상과 가장 멀어 보이는 유명한- 미국인 잭 블랙을 바라본다. 이러한 내적 친밀감과 현실의 거리감이 그리는 쌍곡선이 이번 전시를 밀어붙이게 한 밑바탕 정서일 수 있다.
이쯤에서, 잭 블랙의 오랜 팬이라며 함께 트리뷰트 전시를 만들어보지 않겠냐는 황당한 제안을 해온 기획자보다 더욱 황당한 것은 단순한 트리뷰트 전시가 아니라, 정말로 악기 연습을 하고, 새로운 음악을 발표하자며 한 레벨 높은 무리수를 던진 작가들의 화답이다. 그 중심에 현직 큐레이터로 일하지만, 전시기획의 역사보다는 아무래도 음악활동을 더 오래 해온 정상-인(jsi)이 있다. 그는 약칭 '이빨빠진 음악'이라는 아마추어 뮤지션 양성 프로젝트를 이미 몇 해 전부터 지속해 오고 있다. 이 전시에 합류하게 된 까닭은 삶과 취미, 프로와 아마, 정상과 비정상 사이를 바삐 오가는 그 자신의 순환적 정체성을 "잭-블랙-잭"의 구도에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긴급결성한 밴드 이역 486-1의 리더가 되어 주었고, 여전히 튜닝과 악기 세팅이 어려운 멤버들에게 결코 얼굴 붉히는 법이 없다.
매체 특성상, 공동 작업보다는 주로 개인 창작에 집중 해왔던 작가들- 윤병운(페인팅), 손선경(애니메이션), 안민욱(복합설치)- 역시 올 봄과 여름 동안 기타와 드럼 연습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고요하고 차분한 성정을 지녔지만, 그 내면에 들끓는 열정과 감도높은 유머를 겸비한 그런 멤버들이다. 상암동에서 만났지만, 이역의 지대 북유럽을 동경하고 신비한 뮤지션 비요크를 떠올리며, eejörk, 이요크, 결국 이역이라는 일시적 이름을 급조해 내기에 이르렀다. 올 초, 완전 초짜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밴드는 전시 준비보다는 주말마다 모여 엉터리 합주에 힘쓰며 그렇게 봄, 여름을 함께 헤쳐왔다. 전시를 위한 조사연구나 전략을 세우기보다는 덕질과 팬심으로 히히덕 거리는 시간이었고, 딱 눈꼽만큼만 나아지는 연주호흡에 기뻐한 순간들이었다.
자그마한 스트레스에도 휘영청 흔들리는 기획자, 나아지지 않는 실력에 좌절하는 멤버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의 속도에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는 순간들. 무엇보다 미국으로 보낸 초청 편지와 계속되는 SNS 구애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답이 없는 잭 블랙을 보며 처음의 호기로움은 초라한 심정, 염려하는 마음으로 전이되기 마련이다. 미리 고백하건데 연주나 전시 모두 그리 훌륭하지 않을 것 같다. 과정이 결과보다 소중하다는 말도 그저 흔한 클리셰로 받아들일만큼, 우리 모두는 속된 사람들이다. 좌절에는 좌절할 뿐.
그럼에도, 안 되는 것에 마냥 슬퍼하기 보다는 되는 것에 집중하기로 한다. 박자가 어긋나고, 음률이 뒤엉킬때마다 습관처럼 외쳐본 구호를 입 안에 머금어 본다.
"정신을! 차리자!!"
판화과 나와 기타치는 ÖA님(오산의 아들), 일산사는 종합음악인 ru님(루벤스), 성북동 투잡러 jsi님(정상인), 밴드를 리드하느라 어느덧 파워드러머가 된 ssk(씈선경), 매번이 특집인 조증 기획자 jr (쥬니어).
우리 모두 오늘 하루도 각자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그리고 가장 가까운 주변인들로부터, 잭 블랙 쌍둥이들을 발견하고, 그들과 호흡하며 활기차고 뻔뻔하며 즐거운 음률을 찾아 나간다.
끈질기게, 끈질긴! 호흡으로.
손선경, <tenacious-us>, 디지털 애니메이션, 2019
* 전시는 8월 13일부터 총 4주간, 한국 음악산업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메카인 낙원악기상가 내 미술공간인 d/p에서 열린다. 오프닝 퍼포먼스와 파티는 8월 15일 5시부터 예정되어 있다. 전시의 설치 방식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고민하여 변경, 또 변경이 있지 않을까 하며 공개할 수 없을 것 같다.
** 전시에서 미처 다 들려주지 못한 복합적인 서사들은 한권의 책 <더 트리뷰트, 2019>에 실을 예정이다. 참여 작가와 기획자를 포함한 총 10명의 필자들이 잭블랙과 낙원상가를 경유하는 다양한 기억의 편린과 문화사적 기록들, 런던 콘서트 참관기, JB 직업의 역사를 통해 본 새로운 미국학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전시에 출품되는 애니메이션과 페인팅도 일부 수록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