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약 없이, 건너뜀 없이
- 랴오 차오 하오의 어떤 시간, 어떤 장소
글 조주리
지금은 없어진 것 같다.
어느 해의 합정역 부근, ‘축지법과 비행술’이라고 커다랗게 쓰여있던 의문의 간판 말이다. 대로변 건물의 2층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두 단어의 기묘한 조합을 목격한 이라면 쉽게 잊지는 못할 것이다. 땅을 접어내고, 하늘을 나는 도술이 있다는데 말이다. 차마 올라가 볼 용기는 내보지 못했다. 속는 셈 치고 한번 들어가 볼 걸 그랬나 싶다.
미술의 언저리에서 작고 가벼운 일들을 시작하던 무렵이었을까.
작가들의 작업이라는 것이 일종의 ‘비행술과 축지법’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곤 했다. 매체들을 부리고, 시공을 넘나들며, 집단의 기록과 개인의 기억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이들의 개념적 창작술은 일종의 ‘비기’처럼 여겨졌다. 모호하고 불투명하기에 더욱 신묘한 세계 안에서 우주비행사처럼 곡예를 펼치는 작가들의 축지-비행술 앞에서 공감의 눈빛을 보내며 설익은 문장들로 그 겉과 속을 도해해 보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작업이 도대체 어떻게 시작되어 발아되어 나가는 것인지 못내 알 수 없었다. 이윽고, 저들 관념론자들을 실증주의자인 내가 오롯하게 이해할 길은 없다고 손쉬운 구도를 만들어 버렸다. 모르는 것들은 그저 모른 채 지내려고 했다.
아주 가끔씩은 예술가의 작업 내부로 깊숙하게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삶과 예술을 헤쳐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쯤, 일종의 블랙박스로 규정해버렸던 작가들의 세계를 과거의 신비론으로도 현재의 경험론으로도 알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가령, 장소와 공간, 역사와 일상, 기억과 환영을 다루는 작가들이라면 기실 동시대 미술에서 너무나 비대해진 하나의 지류가 되버렸다. 그 안에서 예술가의 수행과 실천, 조사와 연구라는 말도 흔한 구절처럼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각 개인이 공동의 주제에 접속하는 입각점과 모럴, 조형언어의 차가 있을 테고, 한 사람의 창작 역사 안에서도 미묘한 변곡점들은 등장한다. 일반화와 개별화의 겨루기 안에서, 특히나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처음 만난 작업에 대한 비평의 좌표를 정하는 것은 언제나 난망하다. 그렇기에 일시적인 탐사와 창작을 예비해 둔 정주를 목적으로 낯선 도시를 유목하는 작가들의 지향점과 작업 프로세스, 나아가 그 결과물 마저 대체적으로 유사하다고 묶어버리면 이 또한 무례한 접근일 것이다.
다만, 낯선 것을 오히려 낯설지 않은 것으로 뒤집어 볼 줄 알거나, 비슷해 보이는 것 속에서 완전히 다른 점을 비상하게 짚어내는 통찰과 해석, 주변 환경을 대상으로 한 고고학적 수집 행위는 많은 작가들에게 나타나는 일관된 습성이다. 그로 인해, 내부자의 뭉툭한 시야 안에는 다가오지 않던 풍경의 틈새, 조각난 단편들, 일상의 부유물을 외부자의 시선과 감각을 통해 경유하여 다시 바라보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니, 개인과 집단 단위의 교류가 담보해주는 최소한의 출발점이다, 최대치의 목표점이 아닐 수 없다.
랴오 차오 하오를 만났던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시작했는데, 작가에 대한 설명이나 작업 비평으로 곧장 들어가는 것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서로간의 서먹함, 소통의 피상성을 극복하지 못한 관계에서 출발한 글이므로, 다른 종류의 서사들로 포석을 깔아두고 싶었던 터다. 대만 출신의 랴오 차오하오는 비교적 젊은 작가군에 속하며, 국외 레지던스의 경험은 인천아트플랫폼이 처음이라고 한다. 작가로 성장해온 타이난과 타이베이, 가오슝의 풍광을 떠올리면 어쩐지 이 도시, 인천으로의 장소 이동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계획적이며 끈기있는 호흡, 주변 환경에 대한 극히 세심한 시선, 온건한 성품과 태도는 그의 작업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와의 담담한 대화로부터 나는 그가 작가로 성장해 온 점진적 이력, 그가 행하는 예술적 실천의 범위로부터의 지나친 도약이나 결핍 없이, 적확한 곳에 도달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어떤 장소>(a place)라는 간명한 제목으로 명명된 결과보고전시는 그가 이곳에서 지내온 시간의 결과값이다.
이를테면, 전시는 아마도 그에게 주어진 시간과 탐사공간, 최초의 계획을 충실하게 지켜낸 자리였을 것이다. 작가가 삶의 주변부로부터 우연히 찾아내거나 어쩌면 적극적으로 발굴했었을 거리의 부산물들은 익히 보아왔던 시각문화 환경의 인공적인 파편들이다. 맨홀뚜껑이나 창살의 문양, 보행로의 점자 블럭, 건물의 셔터 따위는 둔한 사람들에게는 세계 어딜 가나 유사한 형태로 편재하는 산업적 디자인물들이다. 반면, 사물 하나하나의 역사성을 꿰뚫어 보려하고, 산업적/상업적 물체들의 외양을 이루는 무늬와 질감과 같은 미시적 디테일로부터 문화지리적인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이들에게는 온통 모든 것들이 놀랍고, 생경하며, 연구 가치 가득한 문화연구의 대상지일 것이다. 물론 작가가 전시장에 옮겨다 놓은 것은 사물 그대로가 아니라, 이를 다시 보드라운 펄프와 다양한 대체 재료를 사용하여 물성의 표피와 적당한 모양새와 두께를 본뜬 것들이다. 그것들이 배치된 방식 또한 중립적 공간 안에서 본래 놓여있어야만 했던 각도와 높이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위상학을 생성해 낸다.
처음, 도시와 문명, 생태를 조각적인 메소드 안에서 재건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전의 작업 이미지들로부터 다소 남성적인 거대 서사를 다루는 작업들이 아닐까 하는 짐작한 바 있었다.
2014년 무렵부터 몇 년간, 작가는 비정형이지만, 굳으면 단단해지는 펄프의 물성을 이용하여 도시 풍경을 재현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작품이 발산하는 메시지는 다소 비대해 보였다. 인류의 발전과 환경보호 사이의 불안정한 균형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작품 설명이 더욱 그랬다. 같은 이유로, 초기 작업의 이미지로부터의 일차적 인상은 거대 문명을 관통하는 반-기념비적 조각의 형상들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산업적 질감과 폐허의 미로 재현된 남성적 서정 같은 것들이 스며 있었고, 그 자체로는 차갑고 녹슨 풍경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내, 부스러질 것 같은 연약한 재료들로 구축된 랴오하오 차오의 조각들은 그 자체가 공격적 재현이나 풍경의 반사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대상을 앞에 두고 막아서고, 밀어내는 듯 공간을 점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구겨지고 스러져 있는 덩어리들로부터 우리는 도시문명의 멸망, 일그러진 세계의 박편이나, 껍데기 같은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가장 최근의 작업들은 구조적으로 볼 때 좀더 수평적이며, 가볍고, 공간을 비워둔 방식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보여질 여지가 있다.
“Geology”로 명명한 이러한 작업의 경향은 2019년 인천아트 플랫폼에서의 작업으로 분명하게 이어진다. 전시를 통해 본 것들은 그가 마을과 도시에서 발견했던 것, 작품으로 그것들을 본 뜨고, 단단하게 다지고, 보드랍게 펼쳐냈던 몇 가지였다. 펼쳐 내고 그러나 이전보다 도시의 파편들은 좀 더 얇고, 작은 단위로 쪼개져 있다. 그리고 건축 재료의 물성과 양감 그 자체보다는 공산물 혹은 도시 오브제의 표면과 그 위의 패턴에 같은 도상들이 도드라져 보인다. 무엇보다 무엇인가를 세우거나 막기보다는 펼쳐내고 열어냈다. 이러한 표면적인 차이점과 작업의 물리적 속성은 어쩌면 그의 작업 안에서 그리 핵심적인 변화는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작업을 해나가는 그의 일상과 장소에 대한 미시적 탐구에 대해서는 글쓴이에게 보이지 않는 작업의 과정에 대한 어떠한 상상과 예지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글을 쓰는 이 순간, 그가 높이 뛰며, 멀리 날아가는 도술을 부리기 보다 여전히 매일 ‘어떤 장소’와 ‘어떤 순간’을 채집해 나가는 착실한 시간들을 지나가기를 바라본다.
오래 전 오해했던 그것, 작가들의 축지법과 비행술을 그로부터 다시 떠올려 본다.
아마도 지금의 랴오라면 어딘가를 빨리 질러서 가는 길이나, 지면보다 높이 나는 법을 택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압축된 것들을 평평하게 펼쳐서 보는 법, 가려진 것들을 후후 불어가며 살펴보는 일, 다시 한번 고이 접어내는 그런 일.
지금의 그가 “어떤 시간, 어떤 장소”를 대면하는 삶의 높이와 속도다.
* 2019 인천아트 플랫폼 입주 작가 랴오하오차오와의 대화를 기반으로 한 비평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