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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Nov 01. 2019

Re: 아직 늦지 않았다.

2019 고양레지던스 이원우 작가 평문

Re: 아직 늦지 않았다.



글 조주리



9월 초, 작가 이원우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각, 그는 지금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Darling Foundry라고 하는 예술기관에 머물고 있다. 작가가 올해 입주해 있는 고양 레지던스와 연계된 곳이다. 상대작가가 전시준비 동안 혹은 인터뷰 시기에 해외에 체류하는 일은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종종 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로 시작하는 활기찬 서두와 두 개의 문서가 첨부된 메일은 내용적으로 퍽 소상하고, 정서적으로도 다감하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 대한 점검과 미술계에 대한 현실 인식같은 것이 담긴 몇몇 문장들로부터 어딘지 신산한 느낌과 먼 곳으로부터 전해지는, 희미한 결기같은 것이 실려와 있다. 글의 마감기간과 방향을 대략 논의하는 단계에서, 나는 작가에게 작업에 대한 직접적 설명 보다는  최근 몰두해 있는 관심사라거나 향후의 계획같은 것들이 궁금하다고 채근한 바 있다. 다른 이들이 쓴 평론 모음을 참고 삼아 훑긴했지만, 동어반복을 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전혀 다른 지론을 펴낼 자신도 없었던 터다. 

어쨌거나 먼 발치에서 꽤 오래 작가의 성장사를 지켜봐 온 한 사람으로서, 오직 궁금한 것들은 그가 써 내려온 성장소설의 해사한 말미가 아닌, 본격적으로 흥미로워지기 시작한 대하소설의 전개-위기의 중간 즈음에 걸려있다.  


이원우를 작가로서 처음 만났던 것은 십이년 전 쯤, 그가 친구들과 함께 결성했던 일종의 콜렉티브인 "좋겠다 프로젝트"의 멤버로서였다. 아직은 서로가 학생-작가, 그리고 견습-기획자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던 때였고,  전통 매체보다는 현장성이 강한 다원적 예술에 관심을 두던 시기이다. 언제나 청년의 모습으로 작가 이원우를 기억 속에 둔 까닭은 그로부터 긍정과 불안이 뒤범벅된 청춘의 모습과 그런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생동감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5년 정도의 느슨한 주기로 스쳤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이따금씩 마주친 작가의 외양, 작품의 외견을 통해 나는 그가 맞닥뜨린 삶의 변화들과 작업을 대하는 작가의 내면, 그 속에 서린 행복과 우울의 징후들을 단편적으로만 유추해 보게 된다. 물론 평균 이상을 상회하는 작가의 안정적인 전시 이력과 지속적인 창작 주기 앞에서 내가 대신 걱정할 것은 없어 보인다. 누구도 해함이 없는 기분 좋은 예술적 유머와 어딘지 힙해 보이지만 안정적 미감을 일그러뜨리지 않는 이원우 표 작업의 면모들은 호감을 불러 일으킨다. 지배적 미술담론이나 시장의 트렌드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 점, 개념미술로써 종합, 승화되는 그만의 말장난과 불량한 시도들이 조각과 설치, 퍼포먼스를 경유할 때 드러나는 특유의 분위기는 이원우의 작업이 또래 작가 혹은 앞뒤 세대 조각가들이 만들어 낸 시각성으로부터 분리되는 독자적 지점이다.


때로 그가 펼쳐온 작업들의 군집이 발산하는 기운에는 지성의 과잉과 전략의 정치함으로 호소하는, 이른바 절박함의 정서가 소거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령, 이원우의 작업은 무엇인가를 매력적으로 재현하거나 반대로 추하게 끌어내리는 법이 없다. 너무 특수한 재료를 사용하지도, 생경한 소재를 다루지도 않는다. 작업의 완성을 위해 지나치게 복잡한 제작 과정과 이론적 맥락화, 대규모 기술적 협업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저 어린아이의 미술처럼 저 좋은 대로 긋고, 칠하고, 손으로 뚝딱대는 무위의 태도와 조금은 의도된 것 같은 아마추어리즘 같은 점들이 있다. 피식 웃게 하고, 잠시만 씁슬하게 만든다. 미술에서의 형태, 개념, 상황, 작품의 쓰임에 대하여 전투적으로 논하기 보다는, 슬며시 관조하도록 유도한다.


“좋겠다!”  이것이, 그의 작업에 대해서 내가 느낀 전반적 정서이다. “좋았다”도 “좋다”도 아닌 미래진행과 미래 완료형에 슬쩍 걸쳐진 표현 ‘좋겠다!’는 중의적인 주체와 대상을 관통한다. 작업이 좋겠다 일 수도, 그러면 좋겠다 일 수도, 보는 이가 좋겠다 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가장 좋겠을 사람은 작가 자신일 수도 있겠다. 여전히 청년같은 그의 작업들은 여전히 재미있어 보인다. ‘재미’란 무엇인가 묻는다면 대답하기 곤란하지만 치사한 구석 없이, 너무 애쓰지 않게 웃긴 점이 그의 웃긴 점이다.


한편 올 한해 현실적 이유로 인해 참여 할 수 없게 되어버린 프로젝트를 함께 헤쳐오며 나는 그가 당도해 있는 어떤 위기와 대응, 고뇌와 해법 사이에 놓인 자잘한 응달과 그곳의 그림자들을 좀 더 찬찬히 들여다 볼 마음이 생겼다. 어떤 순간이 되면 지금까지 손쉽게 규정해버렸던 것들의 반대 상황들을 들여다 보게 된다. 그래서일까. 몬트리올에서 보내온 두 편의 글은 언제나처럼 성실하지만, 어딘지 다르게 독해된다.  글의 제목은 “최근의 관심사”와 "아직 늦지 않았다" 였지만, 파일을 열기 전부터 이미 나는 “최근의 관심사” = "아직은 늦지 않았다"로 한껏 오역하면서 다소 편향된 눈으로 그의 근황과 새로운 관심사를 읽어 내린다.


‘불안’이라고 했다. 요 몇 년간 이원우가 진지하게 사로잡혀 있는 개념이자 리얼한 삶의 상황을 반영하는 테제이다. 최근의 관심사와 앞으로의 행보를 에세이형태로 정리하여 전달할 정도로 진중한 템포의 작가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동시대 예술가들이 처한 불안정한 상황 일반을 떠올린다면 수긍할만한 키워드이다. 대체로, 평온보다는 불안의 정동이 작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작업을 만들도록 추동한다. 작가에게 필요한 순간, 대응할만한 위기가 찾아왔음에, 그의 불안을 불안해하지 않으려 한다. 그가 보내온 글에는 불안에 맞서는 자기 방법론이 담겨 있다.


1. 행운에 기댄다. 2. 춤을 춘다. 3. 거인이 된다. 4. 미래로 가본다.

엉뚱하지만 나름대로 명료하고 상호연결성이 있는 매뉴얼이다. 개별적인 해제를 달지는 않겠지만, 각각의 대응론이 최근 작업들에 개별적으로 링크되는 지점들이 상당히 논리적이며, 여러모로 신선하다. 그가 꺼내놓은 표현들 가운데, 형식적으로는 추상, 손맛이라는 단어가, 내용적으로는 사라짐, 결핍, 재미와 같은 개념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It is never too late to say sorry."

미안하다고 말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고 하는 Elmgreen & Dragset의 공공미술 작품의 제목으로 이원우는 두번째 글을 시작한다. 불특정하나마 독자를 염두해 둔 톤으로 쓰여진, 그러나 여전히 목적이 불분명한 자발적 글쓰기이다. 그 안에는 동시대 미술과 한국미술계의 특수성, 미술과 사회의 관계성, 도덕성과 상업성을 오가는 공공미술에 대한 혼란한 감정들이 실려있다.


나에게 그 미안함의 방향성이 원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여러 층위에서 독해되고, 상상된다. 일차적으로는 미술이 관객들에게, 더 자세히는 의례적 상품으로 기획된 가짜 미술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간에 미안하다는 사과의 메시지 일 것이요. 좀 더 의미를 적극적으로 투영해 보자면, 나는(작가는) 사람들에게 미안해 하지 않을 미술을 위해 좀 더 고민하고 행동하겠다는 자기표명이자, 그것을 방해하는 위기들에 대하여 허허 웃으며 재밌는 방식으로 넘어서겠다는 다짐으로 해석해 보고도 싶다.


거인이 된 작가가 행운에 기대어, 그가 엉터리로 제작한 타임머신에 다양한 사람들을 태우고 함께 춤을 추며, 미래로 가는 상상. 어제와 오늘과 미래가 뒤섞인 곳에서 이미, 여전히, 아직, 벌써 라는 시제는 무용한 경계적 언어일 것이다. 불안이 깊이 잠식한 오늘, 이미 늦어버렸다고 한탄하지 않고,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말해주어, 오히려 정신이 든다.


오늘 밤, 고마움을 담아 답장을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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