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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Nov 10. 2019

필경사 이재훈

무엇을 새길 것인가?  어떻게 그리지 않을 것인가?

필경사 이재훈, 무엇을 새길 것인가? 어떻게 그리지 않을 것인가?  


조주리 



동양화에서 출발해 회화의 외연을 넓히고 사회 속에서 발화할 수 있는 회화 언어와 그럼에도 번역될 수 없는 어떤 지점 사이를 파고드는 작가” 

이것이 내가 누군가에게 작가 이재훈에 대해서 대리 설명할 있는 최소한의 서술이다. 그간 쌓여온 작업들의 역사를 간추려 본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좀 더 설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회화의 언어로써 우리가 속한 사회와 역사의 두터운 겹들과 편린, 이미지의 질서를 구조적으로 세우고 흩뜨리는 일, 기념비적인 어떤 것들을 해체하고, 비기념비적인 일상을 단단하게 조탁해 나가는 과정”. 물론 시대와 사회에 응수하는 예술가 일반의 일이다. 또한 이재훈이 작업을 통해 실천해 해온 특별한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에는 뻔할 수 도 있을 서너 문장을 겨우 뽑아내고 다듬고 나니 초조함이 밀려든다. 힘겹게 헤쳐 온 작가 삶에 깃든 명암과 총천연의 고민들에 대응하는 정교한 어휘를, 정당한 문장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그런 기분이다. 그간의 작업들에 매달려 있던 비평의 해제들은 대체로 이재훈의 작업이 발산하는 진지하고, 어딘지 성난 것 같은 뉘앙스를 반영하듯, 웅장하고 깊다. 그와 다른 온도의 말들을, 작품을 분석할 새로운 예각을 나 또한 뚜렷하게 세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서술자의 미욱함을 작가가 분투해온 시간과 앞으로 맞이할 시간 사이를 재량껏 가로지르며 상상해 볼 여유로 전환해 보려고 한다. 


첫 개인전이었던 2008년 금호미술관에서의 <Unmomument>전을 기점으로 본다면, 이재훈은 지금까지 오십 건이 넘는 전시와 프로젝트에 참여해 왔다. 그간의 분주한 삶을 증거하듯, 전시 이력과 성취의 흔적들이 빼곡하게 담긴 서류가 전하는 것은 작업을 술술, 실상은 애면글면 이끌어 왔을 창작의 속도와 고민의 밀도를 담은 암호 뿐이다. 지난 작업에 대한 많은 단서들과 성실한 자기 표명에도 불구하고 이재훈의 작업을, 작업과 작업 사이의 행간들을 말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다. 정돈된 작가노트와 포트폴리오가 드러내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내심 들춰보고 싶었던 것은 외견상 안정되고 조형적 질서를 갖춘 세계처럼 보이는 창작의 주기율 안에서 훅 패이고, 뚝 끊겨지거나, 확 돌출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지점들이었다. 보기에 따라 그의 작업은 매우 일관된 시각성과 톤을 유지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어딘지 작업을 대하는 내면, 혹은 작업의 앞뒤로 작동하는 삶의 방식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더 큰 변화를 몰고올 작은 징후들이라면, 나처럼 변덕스러운 성정의 관람자들에게는 퍽 반길 일이다. 


그간 나누었던 그와의 대화는 처음 몇 번은 격식 차린 문답이었고, 이후 몇 번은 무람없는 대화로 이어지곤 했는데, 사리분별이 명확하고, 아주 가끔은 강팍해 보이기도 하는 이재훈의 작업하는 모양새는 나에게 필경사의 그것으로 다가왔다. 스튜디오의 문이 닫힌 후, 작업하는 모습으로 상상되는 바는 무엇인가를 유려하게 그리는 화원의 자태가 아니라 철필처럼 결이 곧고 단단한 붓으로 종이와 대면하고 그 안으로 파고들며 세계를 ‘쓰고’, ‘새기는’ 같은 ‘필경사’의 모습이다. 그러한 심상을 가중시키는 것은 물론 그의 작업에 대하여 흔히들 ‘프레스코(Fresco)’라고 지칭하는 독특한 회색조 화면의 색감과 단단한 무엇인가를 갈아낸 듯한 터프한 질감에서 부분적으로 연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적화된 표현 방식을 위해 작가가 고안해 낸 일종의 건식 벽화 기법은 특유의 촉각적 환영을 만들어 낸다. 화면의 구성은 서양화에도, 동양화에도 없을 독특한 일러스트 풍이기도 하다. 또한 서양화 제작에 훨씬 익숙한 이들에게는 후면에서 색을 칠하여 전면부에 드러나게 하는 전통적 배체법이나 원하는 만큼 종이를 쌓아 올려 제작하는, 다분히 수행적인 과정 또한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재훈으로부터 오늘날 소실 직전에 내몰린 직업인 필경사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꼭 작업의 형식적 특징과 작가적 테크닉 때문만은 아니다. 처음 보여준 세계 안에는 묵시록적이라 할 만한 육감적인 죽음과 폐허의 도상들로 가득하다. 여러모로, 기록미술 혹은 재현적 달성과 거리가 먼 작업들이다. 그럼에도, “인쇄술의 발달로 그 수가 줄어들어, 특별한 문서에 미려한 글씨를 쓰는 사람들”로 묘사되는, 필경사를 떠올린 것은 작업을 수행하는 꾸준한 일상의 리듬감과 세계를 좆는 주변부, 관찰자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또한, 현실의 냉기와 까끌거림을 더듬어 보는 꾸밈없는 손길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그가 설정한 작가의 책무는 “이것이 현실입니까?”라고 도발하는 의문부호로서의 회화들을, 회화 속의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일이었을테다. 이전에 본 적 없는 혼성적 질감의 표면을 새겨나가는 제작술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안된 해법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초기작을 포함한 일련의 시리즈들은 기묘한 요소들로 가득 찬 ‘원-오브-카인드(one of a kind)’ 장르 위에 안착하게 되었다. 포효하듯, 그러나 정교하게 내뱉어진 죽음의 우화, 화면 안에 단단하게 지어올린 건축적 구조, 장지에 올린 석회와 먹, 목탄가루로 실루엣을 얻은 인물과 풍경, 텍스트 간의 혼성적 배치는 이재훈의 회화가 예나 지금이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느 좌표에나 둘 수 있는 특이성을 확보해주는 요소들이다. 가령, 동양화 기법으로 표현된 빛 바랜 듯한 석상의 질감과 텍스쳐는 어떤 이들에게는 후기 르네상스 회화를 대표하는 엘 그레코(El Greco)의 재단화나 앞선 시대,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조각적 회화의 신체들을 은근히 떠올리게도 한다. 

한편, 이리 저리 절단되거나 접합, 증식된 신체 풍경들은 그것의 가까운 기원이 학교나 군대와 같은 파시즘적 질서와 연합된 개인의 기억 때문이었을까를 추정해 보게 한다. 즉, 내면에 잠재된 트라우마, 어딘가에 각인된 폭력적 도상에서 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검토는 제도, 규범, 질서가 표상하는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언어적 균열과 시각적 변형을 가하는 것에 대한 프로이드적 독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이 이목을 끌었던 점은 새로운 형식을 빌어 묵직하게 내리꽂는 버석한 촉감과 세계의 응달진 면을 떠낸 듯한 톤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두 눈을 가린 광인들이 승선한 배 한 척, 그 속에서 이미 죽어 부패한 줄 모르고 서로의 등수를 매기고, 무의미한 상벌을 내리느라 여념이 없는 한 무리의 군상들. 필시 우리가 악다구니를 쓰며 멸망에 봉사하는, 그 세계의 자화상 맞을 것이다. 숭고하게 대상을 기념하지 않으면서, 그 스스로는 기념비적인 입상으로 존재하는 <비-기념비(unmonument)> 연작은 과거의 글에서 공감하며 읽었던 표현처럼 ‘버려할 것들에 대한 기념비’ 이기도 하다. 


그 시점으로부터 지금껏 쌓아온 작업의 (문서)더미들을 건네받은  나에게 그간의 목록들은 격렬한 전장과도 같았던 한국 미술계 안에서 나름의 시각성을 세우고 허물기를 반복해 온 작업 역사의 압축적 표제와도 같이 느껴진다. 기념비, 그리고 비-기념비, 나아가 반-기념비의 도돌이표와 그 속에서의 반목, 반복. 새로운 발견과 발언 양식을 향해 분투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서늘했던 한 마디 ‘참 잘했어요’ 이후 세계를, 세계 위로 새겨나가는 필경사로서의 이재훈의 잿빛 톤과 촉각성은 여전하다. 10년간 그가 그러모아온 이미지들은 때로 회화의 표면에 잠겨있지 않고 조각과 설치의 한 부분으로 이행하여 그 속에서 서있고 누웠다를 반복하며 위치 조정 중에 있다. 좀 더 속도를 내어 작업들을 살펴보면, 화면의 농도와 밀도 같은 것들이 달라진 점들이 좀 더 부각되어 다가온다. 단계마다의 변화의 즈음에, 작가로서도 개인으로서도 어떤 부침과 내적 변화들이 있었을지 궁금증이 인다. 


빈번하지는 않지만, 몇 건의 ‘번외적’ 시도들을 제외한다면 벽화기법을 근간으로 하는 작업의 어휘들은 적어도 2013년까지는 순정하게 이어져 온 편으로 보인다. 그 시기를 지나오면서, 좀 더 간소해진 것처럼 느껴지는 화면의 구도와 일상적 오브제의 비-현실적 배치로의 변화태가 감지된다. 동시에, 작품의 타이틀에서 느껴지던 단단한 도발과 결기들도 조금씩 말캉해진, 개념적으로는 좀 더 압축된 시어들로 대체되어 왔다. 가령, 같은 방식의 채색에도 불구하고 ‘붉은 사랑’이나 ‘산’ 넘어 산”과 같은 제목들은, 작업과 함께 성장하고 변화해온 작가 내면의 심적 여유와 언어유희, 예술적 관록 같은 것을 드러낸다. 최근의 개인전 <아! 금수강산>(2018)과 <초원의 결투를 위해>(2017) 또한 각각 최근 관심사와 그것이 반영된 새로운 설치방식들을 예시한다. 이미 부조와 같은 성격을 어느 정도 갖고 있던 화면들은 공간 안에서 훨씬 다양한 위치, 기울기, 높낮이, 간격을 변주함으로써 이재훈 작업의 새로운 전기로 접어드는 모양새이다 동양 철학과 근대 시각문화에 대한 관심 역시 조각의 장으로 현현된 어떤 풍경 속에서 새로운 톤과 뉘앙스를 전달한다. 강산이 한 뼘 쯤은 바뀐 십년 간, 성난 목소리는 냉철함으로, 회화의 자리값은 여러 곳으로 흩여져 가는 그런 여정이었을까. 


오직 그 자신만이 통제 가능한 삶의 속도와 필치로 많은 작업을 새기고, 그려온 오늘의 이재훈에게 내일의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무엇을 새겨 나갈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리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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