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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Nov 25. 2019

<터(play:ground)>

믹스 라이스_우란문화재단_ 월간미술 11월호_전시리뷰

<터(play:ground)> 


글_ 조주리


우란문화재단의 기획전 <터(play:ground)>의 관전 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두말할 나위없이 믹스라이스의 농익은 작가적 믹스-플레이이다. 단순한 언어로 요약하자면 ‘터’는 전통과 공동체, 민속 의례와 노동, 춤과 노래를 다루는 전시이다. 모든 것들을 자연스레 묶어주는 일종의 출발점으로써 강강술래를 택한 것은 명민한 선택이다. 주지하다시피 강강술래는 현대적인 용어를 빌어본다면 그 자체로 매우 다원예술적인 프로그램이다. 드물게, 여성들이 주도하는 협력적 댄싱이자 풍부한 서사가 깃든 뮤직 레퍼토리이자, 사회적 위기 때 더욱 빛을 발했던 시각전술이기도 하다. 


짐작하건대, 미술관이 제안했을 법한 큰 주제와 중심 소재, 즉 전통과 강강술래는 믹스라이스를 경유하면서 전혀 다른 시공으로 변주되고, 민족 서사는 국경을 넘는 탈민족적 서사로 선회했을 것이다. 전시는 그 과정과 증거들을 독창적인 어법으로 보여주는 ‘터’이다. 특별한 시각 도상으로 다가온 것은 ‘고사리’이다. 믹스라이스는 강강술래를 구성하는 다양한 하부 프로그램 중 하나인 ‘고사리껑기’에 주목하였는데, 그러한 선택은  흥미로운 잔상과 잔향을 남기는 데 썩 유효한 것이었다. 

설치, 믹스라이스, 이미지 출처: 우란문화재단 홈페이지
 드로잉, 믹스라이스, 이미지 출처: 우란문화재단 홈페이지


공머무는 동안, 그리고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과 이후까지도 온몸을 휘감는 강강수월래의 록킹(rocking)한 사운드는 실상, 이곳이 아닌 저곳, 인도네시아의 자티왕이 아트 팩토리(JaF)에서 프로덕션 된 것이다. 작업 제작을 위해 몇달 간 믹스라이스가 머물었던 자티왕이는 흙(기와)을 매개로 여러 존재들이 함께 일하고, 변화하는 삶을 나누는 곳이며, 노동과 예술의 이상적 공동체를 표방하는 곳이다. 전시장에서 들려오는 강강술래 노래와 춤은 전남 해남도 강진도 아닌, 바로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음성과 몸짓이다.


이미지 출처: 우란문화재단 홈페이지

한때 벽돌로 지어진 제조공장들이 밀집했던 성수동에서 전통 기와 생산지 자티왕이와 충북 괴산의 탑골마을이 이어지고, 우리네 원시공동체의 노래가 인도네시아의 밴드사운드로 번안되는 과정은 어색하기는 커녕 묘하게 설득적이다. 공예와 전통의 가치를 수호하는 민속적 전시들이 풍길지도 모를 교조와 계몽의 기운이 빠져나간 자리에, 그것을 이국의 온도로 전이시키고, 다시금 우리의 지금과 예전의 마석을 떠올리게 하는 시공간 믹스놀이가 한 자락 펼쳐진다. 


설치, 믹스라이스, 이미지 출처: 우란문화재단 홈페이지
이미지 출처: 우란문화재단 홈페이지


그것은 개발과 이주, 중심부와 주변부,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들을 여러 우회적 언어와 공동의 실천들로써 발언해온 풍부한 경험치로부터 온 것일테고, 우리는 전시를 채우는 노래와 춤, 그 밖의 혼성적 편린들과 원시적이면서도 어딘가 SF적이기도 한 고사리, 청어 드로잉을 즐기는 관람객이 되어 현대적 미술 놀음 안에 성큼 들어오게 된다.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이 전시가 갖는 독특한 장르적 좌표인데, 이러한 의식은 모든 것이 전시라는 이름으로 집어삼켜지는 미술계의 입장이라기 보다 전통공예와 시각문화를 표방한 전시기관들의 생태계를 고려했을 때 의식되는 지점이다. 공예미술관이나 미술갤러리라는 규명 대신 ‘우란1경’(우란 8경 중) 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칭해지는 이곳의 전시들은 전통공예와 현대미술이 과감하게 ‘믹스’되는 양태로 양 진영 모두로부터 은근한 관심을 받고 있다. 


내 보기에, 과감함의 실체는 전통 공예의 소재적 접근과 고귀한 전시술에 있지 않다. 실상 그 반대편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장르나 오브제 중심의 서사로부터 벗어나,  ‘놀이’의 비정형적 태도, 비물질적인 시스템을  중심에 둔 이번 전시로부터 모처럼 기관과 작가가 일구어나가는 협업의 공과 전통을 다루는 관성적 틀로부터의 이유있는 일탈, 여유있는 존중의 가능성을 엿본다. 미술관이 단단한 ‘터’가 되고, 작가는 말랑한 ‘플레이어’가 되는. 


전시전경, 믹스라이스, 이미지 출처: 우란문화재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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