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송신:
임노식의 작동기억으로부터 캔버스의 구멍 사이로
글 조주리
당연한 말 같지만, 회화가 구동되는 방식은 간단치 않다. 재현의 대상과 결과물로 드러난 화면이라는 이자적 구도 사이에는 수 없이 많은 변인들이 존재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매개항은 물론 화가 그 자신이다. ‘눈과 머리’로 제유되는 페인터의 감각수신기는 그것들을 종합하고 해석하는 고유한 독해장치이자 동시에 커다란 몸통으로부터 손끝의 미세근육까지의 동시 협응을 지시하는 컨트롤러이다.
동일한 시공간이 작가의 육체와 지성을 통과하는 사이, 그 결과물들이 다른 양태로 개별화되는 까닭일 것이다. 누 천년 간 누려온 회화의 독자성에 대한 설명이기도하고, 동시대 이미지 생산자로서 회화 작가들이 존립하는 근거이기도하다. 무엇이 어떻게 회화로 변환되는지에 대한 착상의 시점과 세계를 감각적으로 분할하고 배열해내는 과정은 작가의 언어적 표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블랙박스 안에 머물러있다.
작가 임노식은 임팩트 있는 시각성을 창출해 내는 데 온 에너지를 집중하거나, 이른바 포스트 인터넷 시대를 지나고 있는 회화의 조건들을 실험하는 범주의 작가군으로부터 슬쩍 비켜서 있는 인상이다. 물론, 구체적 서사가 배제되어 보이지만 실은 무언가 비밀스런 사건이 일어났거나, 곧 일어날 것 같은 음산한 서정이 배어든 화면의 잿빛 톤 같은 것들이 충분히 인상적이긴 하다.
게다가, 근작으로 올수록 독특한 느낌을 주는 작업의 구성과 감성은 그가 전통 회화의 생산과 소비의 관습들로부터 확연히 자유로워지고 있는 요즘 세대의 작가임을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풍경 회화가 설치로 확장되는 단서들이 캔버스 안과 바깥에, 디지털 세상에, 전시 공간에 다양하게 흩뿌려져 있다. 그는 어떤 작업을 해나가려는 것일까.
Folded Time, Hapjungjigu, 2017 여전히 젊은 작가인 임노식에게 ‘초기작’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겠지만, 2014년부터 몇 해 동안 집중적으로 그려진 ‘축사 풍경’ 시리즈는 그를 미술계에 각인시키게 한 일종의 ‘입봉작’이 되었다. 기법적으로 충분히 잘 그려진 작업들이었고, 소재적으로도 ‘언캐니한’ 연작들이었다. 주목을 끈 점은 비단 그러한 요소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독하게 일상적인 공간이자, 가족적 풍경이었을 축사와 젖소의 모습을 잿빛 톤으로 담아낸 초기의 작업들은 작가의 오랜 기억 속에 담겨져 있던 이미지 더미로부터 출력된 여러 각도의 파편들이다. 나는 그 풍경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View from the inside_1, acrylic on canvas, 890x250cm, 2016 copy View from the Inside, OCI Museum, 2016 그의 말대로 그저 대상을 ‘떠냈다고’도 볼 수도 없다. 작가는 확실히 대상을 보고 그렸겠지만, 아마도 (나의 가설에 따르면) 재현의 본질적 과정은 그의 장기 기억 속에 풍부한 라이브러리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들이, 화면을 설계하고 그리고 채색하는 동안 다시 그의 ‘작동 기억’ 로 옮겨와 좀더 단편적이고 심리적인 미장센으로 번역되었을 것이다. 작동 기억(working memory)이란 일반적으로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관여하는 기제로, 특정한 정보를 마음 속에 유지하고, 복잡한 층위의 인지 작업으로 도약하게 하는 중간 처리 과정이다. 반면, 익숙한 삶의 영역들을 화폭에 재건하는 일은 장기기억을 낯설게 처리하는 역-프로세스에 해당한다.
최근 나는 임노식으로부터 그가 준비하고 있는 다음 전시 <우연한 접목의 목격자>(가제)의 작업 노트를 건네 받았다. 작가는 회화의 근원이 누군가가 눈에 담은 것을 화폭에 옮기면서 시작된 것임을 복기한다. 그의 말을 빠짐없이 옮겨본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담아 달라는 부탁을 한다면 그는 손바닥을 오므리는 형태를 만들고 손을 천천히 올릴 것이다. ‘회화’의 복기는 바로 이 손에 담긴 풍경을 들어 눈으로 가까이 하는 것에서 출발점을 가진다. 그러나 모래를 담아 눈 가까이로 올리는 행위에서 떠올릴 수 있듯이 우리는 필연적으로 떨어지는 모래알들을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다. 파편으로 떨어지고 분산되는 모래알들은 이미 담고 있는 모래 더미를 놓칠 수 없기에 마치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서 조금 멀어져 그 형태가 보이지 않는 것뿐이다. 캔버스의 직조 사이 사이에서 모래알처럼 풍경은 유실되고 결국 남는 것은 풍경을 담은 프레임인 동시에 그들의 잔존이다.”
작가의 사유가 도달한 지점은 무엇을 어떻게 그려내는가에 멈춰 있지 않다. 이윽고 혹은, 다시금 회화의 작동 방식과 회화 안에서의 풍경의 재건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경계 혹은 장치로서의 프레임에 관한 언급은 회화에 담기는 것들의 여집합에 관한 의식이자 작업과 작업 아닌 것, 일상과 일상 아닌 것에 대한 총체적인 노트이다. 비교적 고정적인 위치 값을 점하는 정물이나 인물과 달리 풍경은 프레임 바깥으로 버려지거나, 포기되어지는 데이터 값이 많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스냅 사진과 유사한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과 또 달라, 현장에서 선택된 구도는 작업실의 캔버스 위로 옮겨오면서 이후 회화의 실행과정에서 매우 독자적인(디지털 보정과는 전혀 다른 층위의) 편집 과정을 거치게 된다.
Solmi road02, oil on canvas, 193x130cm, 2019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최종적으로 선택되는 이미지들은 개인적인 신체의 체험과 특별한 연관성이 있는 것들이다. 오래 머물렀던, 혹은 자주 걸어 다니는 장소를 벗어나 다시 그곳을 찾을 때 새로운 발견을 할 때가 있는데, 무뎌진 공간과 장면들은 삭제되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미지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의도적인 반복을 통해 무감각한 시공간을 걷어내다 보면, 일말의 의미없는 풍경들은 캔버스 구멍 사이로 빠져나간다. 편집적으로 도려낸 풍경이 아닌, 잔존하는 풍경이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회화가 얼마나 시간적인 장르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Screenshot_3,oil on canvas,90x72cm,2017 Landscape_14,oil on canvas,160x130cm,2017 landscape_19,oil on canvas,112x162cm,2017 다시 한번 작가의 작동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본다. 원어로는 말그대로 ‘일하는’ (working) 기억(memory)이다. 축적된 기억 일부를 지워 나가기, 무감각해진 도시의 구석 안에서 접혀 있던 시간을 되살리기. 검푸른 영등포의 녹턴과 창 너머 펼쳐진 난지의 핑크빛 석양을 그리느라 분주했던 것은 붓을 쥔 손 뿐이 아닌 그의 중추신경계, 운동 뉴런, 시상하부의 전달물질이었을지 모른다.
지난 몇 해 동안 임노식이 생산해낸 작업들이 말해준다.
어제와 다른 풍경을, 내일 소거될 지 모를 풍경을.
눈 앞에 송신된 화면 속에서,
캔버스 프레임 바깥으로 달아난 시간과 틈 사이로 빠져나간 기억까지를
애써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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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YI, 본 비평글은 2019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의 비평가 매칭 프로그램을 통해 의뢰, 저술된 글로, 당해에 비평 앤솔러지가 출간된다. 영문교열본이 확정되면 다시 업로드할 예정이다. 텍스트 개제와 배포의 주요한 권리를 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두며, 저자 또한 글의 권리를 갖는다.
삽입된 이미지는 임노식 작가의 홈페이지로부터 온 것이다. https://nosikl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