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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Jun 30. 2021

삼중주 - 꼬리에서 꼬리로 꼬리를

중간지점 <제 2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 리뷰

“삼중주” - 꼬리에서 꼬리로 꼬리를 

 

글 조주리 (전시기획, 미술비평) 


 

제 2회 <꼬리에 꼬리를 물고>는 성실하지만 의뭉스럽고, 우발적이지만 끈기가 있는 그런 전시다. 머리로부터 심장, 저 말단의 사건들을 듬성듬성 이어내는 일의 흐름은 미미함 끝에 비밀스러운 창대함이 있으리라는 암시를 준다.  2회라는 점, 그 또한 안도감을 준다. 2회가 있다는 건, 아마도 3회가 있을 확률도 있을 테니까. 3회차의 2회차쯤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전시는 “전시에 관한 전시”다. 전시에 내재된 우연성과 통제 불가능한 변수를 설계한 뒤, 다시금 방치하고 끝내 수습하는 일이 도모되었다. 그러나 전시는 결코 작업을 앞지를 수 없으며, 작업 또한 아이디어를 앞지르지 못한다. 또한, 창작을 주도하는 존재라 하더라도 전시라는 시공과 그로 인해 얽혀 있는 인물들 간의 일을 온전히 통솔할 수 없다. ‘전시 경기’라는 부제가 그 점을 잘 말해준다. 잘되고 말고의 확률은 일정 부분 예측 가능하지만, 잘되거나 말거나 경기는 진행되는 것이고, 다들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요점만을 기술하자면, 전시는 예술적 경기다. 기획자는 경기의 전반의 룰 메이커이며, 작가들은 아마도 그 룰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거나 또 다른 룰을 제안하며 그 안에서 경기를 뛰는 플레이어이자 게임 체인저가 된다. 그러나 전시경기라는 말이 갖는 수사적 의미에서 한 단계 나아가 작가와 기획자, 관람객 모두에게 이 전시가 어떠한 실천으로 인식될 수 있을까? 기획주최의 말마따나 그들이 파 놓은 전시의 ‘구멍’이라는 것이 작품의 몸체를 뚫고 나와 어떻게 공간으로, 관람자의 품으로 전이될 지 궁금해진다. 


경기의 당사자들은 흥미로운 진행을 돕기 위해 커다란 구멍 하나를 파 두었다. 단체전에 참여하는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작업의 특질을 알지 못한 채 공동의 공간을, 하나로 인식되는 전시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야한다. 이러한 시도가 미술역사에서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주변 작업을 모르고도 그럭저럭 구도를 만들어내는 그룹전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들은 그와는 다른 구도에서 절묘한 퍼레이드를 펼쳐 나간다. 눈을 가리고 촉각과 온도의 감각으로 코끼리 뒷다리를 더듬어가듯, 온 세포를 동원하여 주어진 공간을 분석하고 작업의 좌표를 찍어보고, 시각적 인상을 빚어내는 협동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한편 작가를 전시경기에 초대한 중간지점의 운영자가 배후에 있지만 기획 매개자가 되어 참여자의 세밀한 의견을 조정하거나 갈등을 중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설계자, 관망자에 가까운 역할이다. 다섯 작가들은 온라인 톡방에 ‘가명’으로 초대되어 전시의 세팅과 물리적 조건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마주하는 문제점들을 함께 논의하며 해결해 나갈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치가 전시 구성과 문제 해결에 있어 얼마만큼 의미있는 성공 혹은 방해 요인일까? 즉, 전시를 만들어 나가는 통상적 절차나 관계 설정을 따르지 않을 경우,  짜임새 있는 전시가 나올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일까? 반대로, 전시 만들기의 관습을 따르지 않았음에도 좋은 전시가 나올 수 있다면, 이러한 시도가 일종의 제도 비평적인 성취로써 자임되어야 하는 것일까? 여러 쌍의 딜레마를 포함하는 양가적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가정하여 질문해본다.   


1. 단일한 조건의 공간을 동등하게 나눠 쓰는 것이 아니라면, 

2. 전시공간 내부에서 작품의 선후 배치와 높낮이, 광량과 사운드 같은 물리적 요소, 작품의 개별적 특수성과 전체를 관통하는 미적 서사를 기획자가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면, 

3. 마지막까지 서로의 작품을 실물이 아닌 상태에서 (가령, 온라인 상의 채팅으로 함께 구성한 스케치업이나, 간단한 시각적 시뮬레이션 등으로만) 가늠하여 조율해야 한다면,


작가들에게 주어진 불투명한 상황이 실존적인 갈등과 예술적 불화를 유발하였는지, 일종의 게임적 상황으로 즐길만한 사건이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애초부터 하나의 공간을 동등하게 나눠 쓰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전시의 시공을 둘러싼 개인의 주장과 양보, 선택과 포기, 드러남과 감춤의 총량은 제로섬, 그저 시시각각 결정의 좌표만 달라졌을지 모른다. 특정 공간이 특정 작업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는 판단도 전시형태 안에 집단의 자기 효능감을 일치시키기 위해 강제된 신념일지 모른다. 결국 죄어오는 시간과 협소한 공간이라는 두 개의 축 위에서 각자의 눈치와 공동의 협치로 어쨌든 마무리될 일이다. 그러니까, 요점은 원래 전시 만들기 자체가 구멍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신기하다. 작가들 간의 전인적인 관계성이 결여된 속에서도 합리적인 상호 탐색과 직관적인 큐레이팅이 전개되고, 작업의 물리적인 특질을 적정하게 고려한 전시공간 구성이 도출되었고, 결과적으로 상당히 매력적인 시각성이 창출되고야 말았다. 경로와 계통을 알 수 없는 작업들의 모음일지라도 전시는 그 자체로 우연한 매력을 발산하고, 원심력 있는 주제가 없더라도 감상의 통로를 열어놓는다. 


이런 전시를 지켜보는 일은 관람객으로서 무척 흥미롭지만, 직업 기획자로서 뜨끔하기도 한 과정이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전시를 위해 일부러 파 놓은 구멍은 진짜 구멍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공교롭게도 참여자들의 성향이 상당히 협력적인 인품이거나, 합리적 의사 결정자였기 때문일까. 그 보다는 유사한 행로를 거쳐 미술 창작자로 안착하고, 오랜 기간 특수한 환경을 경험해 온 사람들 간에 공동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태도와 방법론이 갖는 동일성과 안정성에 기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획 매개자를 통해 작가 간의 소통이 배가되고, 작업의 서사가 풍부해지고, 전시의 시각성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점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기획에 기대고 있는 마술적 환영 일 수 있다. 


알맞은 전시였다. 그러나 전시 공간을 찾기 위해 적당한 경로를 파악하고, 지하철에서 나와 골목의 정경을 훑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비밀스러운 공간에 입장하는 것 또한 전시 관람의 일부분인 나와 같은 관람객에게 이 전시의 어느 부분이, 어떤 작업이 훌륭한 지 묻고자 한다면 대답하기는 곤란하다. 전시의 전말과 세세한 과정을 알 수도 없거니와 그런 점 때문에 작품에 대한 감흥이 바뀔 일도 아닌 것이다. 전시가 갖는 총체적 인상 안에서 차갑고 따듯한 이미지 조각들이 잠시 내려 앉았다, 차츰 기억도 기분도 흐릿해진다.


전시는 한참 전에 끝났고, 계절이 바뀌어 버렸다. 근방을 지날 때면 멀리서 전시장이 있는 어둑한 빌딩과 그때의 작은 방을 잠깐 떠올린다. 평생 한 사람의 작가가 수행하는 수많은 전시의 총량과 각각의 경중을 헤아린다면 아마도 그 전시는 꼬리 깨에나 오는 미미한 전시일 것이다. 그렇지만, 다섯 작가가 더 창대한 존재감을 지닌 작가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얼마간은 올 봄의 전시에서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현장의 기획자들에게, 관람객들에게 궁금하고 미심쩍은 존재로 있어주면 좋겠다 싶다. 과정을 거치지 않고, 중간에 우회하는 법 없이 저 멀리 도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섯 작업의 다음 마디와 그 다음 마디는 다시 어디선가 다른 표정으로, 달라진 자태로 마주치게 될 일이다.  


좁은 문 틈으로 어둠이 스며 들어오고, 하나 둘 건물에 불이 꺼지면, 캔버스의 그림도 좌대 위의 조각품도 그저 물질 덩어리다. 화려하게 빛나는 아티스트의 이름도 그저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명, 거기 누구, 비누방울님, 소소양, 요를레이유후씨, 미스터ARP299, 마담 베버리 솔트처럼 이윽고 허명으로 흩어진다. 다시 해가 뜨면 경기가 재개될 수 있도록 밤새 우리의 도시가, 그들의 삶이 두루두루 강녕했으면 좋겠다. 다음 구멍이 그들을 기다린다고 해도 어쨌거나 또 다시 뛰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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