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한이 공들여 제작한 북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팽팽한 가죽 표면을 두드려 소리로써 공간을 진동시키는 악기라는 사실을 어느 틈엔가 망각하고 만다. 그저 각각의 모양과 질감이 발산하는 독특한 시각성과 육체적 끌림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의 북은 사람을 밀치기도, 적극적으로 다가오게도 만드는 요망하고도 서늘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런 류의 감정은 전시된 사물이 특정한 존재로 인식될 때 일어나는데, 나에게 그(것)들은 ‘정성스레 만든 못생김’과 ‘잘 못 만든 아름다움’ 사이 어디엔가 걸쳐져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작업이 매개하는 청각 정보와 약속되지 않은 신체적 움직임에 앞서 존재의 태와 사물의 기질을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지난 여름, 작가와 대화 나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그가 북을 어떻게 만든 것인지 반복해서 묻곤 했다. 물론 악기의 제작술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질문은 진의는 요한 한이 붙들어 온 예술적 쟁점들과 작업들 간의 이동 궤적 안에서 ‘북’을 둘러싼 현재의 풍경으로 옮겨오게 된 계기와 변곡의 지점들을 따라가고자 하는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작업 초기부터 요한 한은 완결된 조형적 결과물을 빚어내는 것보다 빛과 소리, 사람들의 움직임을 매개로 하여 특정한 상황을 설계하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일들의 궤적들을 좇아온 퍼포머이자 프로듀서였다. 전시에 내장된 열린 구조, 모의된 상황과 즉흥적 반응 간의 긴장감, 공간 전면에 펼쳐져 있는 드로잉적 흔적과 조각적 배열, 작가와 관객, 작업의 부호를 이어주는 디지털 인터페이스는 지난 실천들을 통해 보이는 작업적 특질이다.
그러나 최근에 만들어진 다양한 북 작업이 갖는 디자인적 심미성과 연결되는 심리적 효과는 그의 작업을 다른 위상으로 끌고 가는 것 같다. 제작의 서사를 짐작하게 하는 수행적 과정이나 작가의 지적 분투 안에서 일어났을 탐구의 여정은 팽팽하게 당겨진 피막 안쪽으로 봉인되어 있어, 관객들로 하여금 좀 더 정제된 오브제의 외관과 그들 사이의 미적 배열을 집중해서 보게 만든다. 우리가 인지하는 물질 문명 속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사물의 비율과 용례로부터 어딘지 어긋나 있는 듯 자리하고 있는 낯선 존재들에 대한 관망과 관찰을 지나 누군가는 이윽고 질문을 꺼내 들게 될 것이다.
가령, 나는 지구인이 만든 ‘북’이라는 사물을 난생 처음 대면한 행성 바깥의 존재라도 된 듯, 이것은 무엇-하는 것일까? 정도의 원시적인 의문을 직정하게 내비쳐 본다. 저기 저 기다랗고, 구불거리며, 통통하고, 주름진 각각의 것들은 실내를 장식하는 호화로운 공예품일까. 다산이나 죽음을 부르는 토템일까. 그도 아니면, 동물의 살결에 죽은 영혼을 결박시켜놓은 사냥꾼의 박제품이었을까. 눈 앞에 펼쳐진 오브제에 이런 저런 상상을 쏘아올리다 보면, 6세기 무렵의 금관 가야, 몽골을 경유한 유라시아의 스텝까지, 저 멀리 아프리카 사바나의 평화로운 임야까지 그의 악기들이 잔뜩 풀어 헤쳐 놓은 몽상들로 인해, 관람의 지정학이 급격히 (좋은 의미로) 광폭해진다.
어느 순간 빠져드는 하릴없는 상상은 일차적으로 작업의 외관과 외피 때문이겠지만, 그것들의 군집이 갖는 반 제도적, 탈 지역적 뉘앙스 탓이기도 하다. 상상의 민속 박물관을 빠져나와,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듯한 미술관 속 아틀리에 안에 머무는 듯한 ‘라이블리’(lively)한 감흥으로 인해 관람을 넘어 즐거운 구경으로 전환된다. 또 한 가지 잊지 않고 즐겨야 할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요한 한의 작업들이 갖는 언어적 감각과 연구자적 태도이다. 에돌이(회절, Diffraction)나 지부스(Gibbous)와 같은 생경한 단어들을 나는 그의 작업들 덕에 알게 되었는데, 빛의 파동이나 달의 변화를 설명하는 지구 물리학적도 용어의 적용도 그렇지만, 시각적 형태를 언어화 하는 그만의 창의적 직관과 제목에 담긴 유머에 공감하게 된다. 음악과 춤, 사물과 사람, 현장과 바깥을 연결하여 공명시키고자 하는 장치는 세심한 설계와 전략 안에서 가능한 일이다.
올해 금호 미술관에서 선보이는 작업은 근작들로 이루어진 구성이다. 최근 몇 년 작가가 집중해 왔던 ‘공명’ 연작을 화두로 이전의 전시에서 시도했던 흔적들이 공간 안에서 포개어지고 녹아든 모습이다. 요컨대, 전시는 아틀리에의 재현이라는 공식을 채택하였다. 정확히는 전시공간으로 주어진 미술관 공간을 전시 기간 동안 연습실’화’ 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전시가 진행되는 중간에 종종 전시장에 출몰하여 작업의 일과를 지속하고, 새로 연습하고 익힌 것들을 더하며, 어떤 부분은 관람객에게 맡기기도 하는 실천적 의도가 기획대로 잘 발현될 수 있을지 좀 더 지켜볼 필요는 있다. 제도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퍼포먼스의 역사에서 교육된 관람객들은 어떤 경험치를 갖고 있다. 전시 전에 서술되는 비평문에 결코 담길 수 없는 현장의 요소가 더욱 많아 지기를 바랄 뿐이다.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은 신체적 궤적이 가느다란 스크래치로 남아있는 푸른 댄스 플로어에 시선을 두게 되는데, 누군가 춤을 추었던 흔적은 머리 속으로 누군가의 움직임을 재생해보게 하는 매력적 장치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도 작업실을 신작 제작의 공간이자 자신의 춤 연습실로 사용해 온 작가에게 ‘플로어링(Flooring)’는 작업자가 생활해 온 일년 간의 삶의 흔적을 드로잉의 방식으로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곧이어 다가올 미지의 퍼포먼스를 예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플로어 주변에는 공간을 에워싸는 다양한 장치들이 놓여있다. 말 그대로 연습실이자 공방인 것이다. 다양한 주법으로 연주가 가능한 북들과 작은 건반, 오디오 인터페이스가 있고, 공간에서 파생된 상황을 시각적으로도 중개해 줄 등신대 크기의 모니터가 있다. 어제의 아틀리에는 종료되었지만, 새로운 아틀리에가 오늘 여기에 열려 있다. 미술관의 정적을 깨는 파아란 쓰레드가 펼쳐졌으니 북이 춤추고, 관객이 두드릴 차례다. 둥둥, 두둥두둥, 두두두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