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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Oct 02. 2021

이은지:오늘을 타고 오르는 클라이머,어쩌면 내일의 러너

2021 금호미술관 - 이은지 

이은지의 자화상- 

오늘을 타고 오르는 클라이머, 어쩌면 내일의 러너  



글 조주리



2018년의 첫 전시 <짐과 요동> 이후 몇 차례의 전시를 거치면서 작가 이은지는 벌써부터 독자적 화풍과 작업 논리를 구축한 노련한 화가로 진입한 느낌이다. 이러한 단언은 작가가 원치 않을 부담을 지울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 부단히 작업을 전개한 이들이 고민할 법한 지점을 서너 수 앞서 굽어보는 작가의 고민 역량을 떠올릴 때 내게는 적확한 평가다. 화면 안과 밖에서, 그리는 행위의 전방과 전시의 후면에서 이미지를 조적(組積)하고 각 연작 간의 총체적 게슈탈트(Gestalt)를 이어나가는 명민한 해법까지도.  


이은지의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살펴보면서 그가 구조주의적 사고를 하는 형태론자일 것이라 짐짓 생각해 본다. 구조주의자들은(structuralist)는 개별체의 속성과 항구적 기능에 천착하지 않고 사방으로 뻗어있는 관계의 변화태를 주시하기 때문에,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구조와 체계에 표면에 깃들어 있는 원리를 추적한다. 


그런 점에서 ‘크리퍼’(Creeper)‘는 사물과 자연, 문명의 구성과 예술적 잔해, 전체와 부분을 이해하는 세계관으로부터 튀어나온 작가의 원시적 어휘이자, 앞으로 그가 빼곡하게 축적해 나갈 예술적 글로서리(glossary)의 도입부가 될 것이다. 물론 작업에 대한 수사가 사회학적 분석이나 언어 철학의 맥락에서 온 것은 아니다. 도리어 작가 스스로가 기술한 크리퍼에 대한 조작적 정의로부터, 어쩌면 그가 표현해 나고자 하는 덩굴의 구조는 작가 자신의 그것일 것이라는 추론을 세워보게 된다. 그의 말을 빌자면, 크리퍼는 서로의 막과 침입으로 채워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덩어리들에 대한 접근이다. 모든 것은 개별이기도, 전체이기도 하며,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다. 또한 크기나 느낌을 정확하게 형용할 수 없는 ‘응어리’ 상태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덩굴이든, 응어리이든, 무엇이든 크리퍼의 자리에 대입되어 그려지고, 독해되어야 할 것은 화면 속의 결과물과 화면 밖의 창작자, 끊임없이 증식되어 나가는 화가의 자의식과 버려져야 할 어떤 것들 사이의 대극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양립 가능할 수도 있는 세계의 구조, 이미지를 다루는 작업의 숙명일 것이다. 


한편, 흰 벽과 검은 회화 사이의 강력한 대비의 풍경을 자아냈던 이전의 전시 <짐과 요동> 역시 그러한 연장 선상에서 바라볼 일관된 단서를 제공한다. ‘짐’과 ‘요동’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고민하는 젊은 작가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쥐어주며 공간을 지배하는 작품 간의 물리적, 심리적 관계에 대한 쟁점을 내비치는 전시였다. 일생을 이고지고 가야할 것이 짐짝같은 작업일테지만, 곧이어 뒤따라올 이동과 폐기, 환대와 냉대를 예비하는, 따라서 중간 지점에서 견뎌내야 할 심리적 요동일 것이다. 


이미 이 전시에서부터 이은지의 회화는 회화의 단면과 단독성 보다는 그것들끼리 포개어진 면적과 수직, 수평의 두께, 멀리서 보았을 때 인지되는 조각적 매스감을 보여주었고, 그로 인한 전체 속의 부분과, 부분을 통해 증식되는 전체 구조의 시각화를 방법론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화면에서 대상을 재현하거나 서사적 맥락을 소거하여 형태를 환원하는 일, 붓을 쥐고 그리는 이의 주체적 감각과 작업이 속한 실제 삶을 추상화하는 일 대신에 그의 전시는 보관과 처리, 탄생과 죽음이라는 또 다른 위상에서 작업이 드러나는 방식을 새롭게 시도 한 바 있다. 


그가 새롭게 준비 중인 연작의 제목 ‘클라이머’를 듣고 빙긋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작업실에서 그가 몰두하던 어떤 행위가, 전시실에서 시도해 보고자 고민하던 실천의 자태가 꼭 등산가와 닮아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크리퍼가 온건한 기세로 담을 타고 올라오는 힘의 방향성을 연상시킨다면, 클라이머는 좀더 육중하고 빠른 기세로 무엇인가를 감싸 올라오는 차별적 심상을 준다. 지난 전시에서 사용되었던 리플렛이 다시 재료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작업의 물리적 형질은 바뀌지 않았지만, 공간 안에서의 가상적 운동성과 개념적 변경을 시도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다. 


전시장 벽에 걸린 것은 10개의 그림이 연결된 각각의 화첩 11 폭.  그리고 하나의 화면에 레이어가 구축된 정방형 회화가 나란히 병치되어 있다. 수성 흑연으로 표현된 창 밖 세상의 표피와 그것들이 가로로, 세로로, 위로, 아래로 이어지는 정경은 나뭇잎의 확대된 부분, 줄기가 갈라진 부분, 기둥의 중간, 어쩌면 저 너머의 숲처럼 다가온다. 레이어들이 중첩되고, 이윽고 서로가 서로를 가림으로써 추상적 세계로 이행한다. 멀리서 본다면 회색조의 단순한 면이겠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화면의 파편과 레이어가 뒤얽혀 분별 불가능한 조각적 환영, 망막에서 응어리 지고 저절로 풀어질 잠재적 태가 된다. 


중력을 타고 어둑어둑 흘러내리는, 덩굴의 손을 기어이 뻗쳐 위로 타고 오르는 건너편의 화면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자리에 서서 작가가 펼쳐낸 시간의 화첩들을 그저 매체적 변주로, 회화적 플레이로만 이해하지는 않으려 한다. 환호받게 될 작업의 미래와 남겨진 작업의 뒤안길을, 나무로 태어나 종국에는 구겨지고 갈려져, 작가에게 짐으로 남을 종이의 일생을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어딘지 너무 조숙한 것 같은 작가에게 지금의 생생한 젊음을 꽉 붙들고 있으라 당부하고 싶은 오늘의 나를 고요하게 겹쳐본다.     






2021 금호미술관 의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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