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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Jan 06. 2023

김영은 : 소리의 틀, 청취의 각

송은미술관 2022년 김영은 개인전 - 월간미술 9월호 리뷰

소리의 틀, 청취의 각 




글 조주리 



작가 김영은의 새 작업들을 개인전에서 만나는 일이 퍽 오랜만이다. 수사나 상징을 거둬낸 전시 제목 〈소리의 틀〉은 꼭 그다운 것이어서, 불필요한 예단을 유도하지 않고 오직 ‘소리’와 ‘틀’, 이 두 말의 의미와 관계에 집중하게 한다. 그간 다양한 시각에서 소리를 탐구하고 다루어왔던 김영은의 이번 전시는 소리를 조형적 도구나 청각적 재현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그것을 규정해온 역사적 제도화와 음악사적 담론에 초점을 둔 것처럼 보인다. 떠올려 보면, 동형의 그룹으로 묶이기 좋은 ‘사운드아트’ 계보 안에서도 그의 작업은 사운드 퍼포밍 그 자체를 지향하기 보다는 소리가 흐르고 있는 특정한 상황에의 사회적 맥락을 드러내거나 이를 통해 환기되는 문화적 심상과 기억 요소 등에 좀 더 집중된 편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지식으로서 소리의 역사를 “되감기” 해보는 연구 프로그램인 동시에, 기존 작업의 유산으로부터 최근의 실천까지 일관된 흐름을 부여하는 “작업 위의 작업” 혹은 “전시 위의 전시”처럼 읽힌다.


소리, 음(音), 음향, 음악, 청각, 청취와 같은 말들은 유사어처럼 보이지만, 각기 다른 현상을 지시하고 있음을 금세 깨닫게 된다. 시각예술에서 소리를 매체로 다루는 작업들을 기술할 때 쓰는 용어의 뭉툭함 속에서 각각의 본질과 함의를 예리하게 간별(簡別)하고자 한다면 전시가 다루고 있는 ‘소리’의 규범과 용례들을 더욱 긴장감 있게 따라가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전시는 그런 점에서 우리의 귓바퀴를 바짝 조여주고, 씻어주고, 풀어주는 다성적 공간이다. 소리 와 음악, 음악학(Musicology)에 대한 지속적 관심사와 예술적 연구를 기반으로 한 이번 전시는 근대화 과정에서의 ‘소리의 소리화(化)’ 과정의 추적인 동시에, 공식적 청각 문화로 편입되지 못한 것들을 통합적으로 상상해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감각과 취향의 사적 영역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제도와 시스템, 문화 정치의 면면으로 옮겨와 근대화, 식민화, 서구화라는 삼각 서사로써 미분(微分)해 보는 일은 문화연구자의 역할을 수행한 작가의 몫이었지만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전달되고 공유되는 과제가 되었다. ‘페다고지’(Pedagogy, 교육학) 실천의 의도와 관계없이 관람자로서 이 전시를 본다는 것은 곧 새로운 청취 훈련이자, 기존의 지식지를 여러 각도에서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탈(脫)학습의 경험이기도 하다.


김영은, 밝은 음 A (Brilliant A), 2022


한편, 작업 전반에 적용된 민족지학적 연구조사의 방법론이나 방대한 분량의 문헌 연구, 다큐멘터리적 재구성을 위해 쏟아넣은 일련의 노력은 어쩌면 작가의 의제를 관람객의 인식 깊숙한 곳으로 매개해주는 정당한 프로세스이자 필수적 퍼포먼스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소리 의 틀〉을 구성하는 작업들은 풍부한 고증과 예술적 재현, 음향적 실험을 하는 것과 같은 제스처를 취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을 꺼낸다. 그것은 문화적 헤게모니에 관한 물음이자 매 뉴얼을 정하고 따르는 주체 간의 위상차에 관한 확인이며, 시공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망 실과 정보의 해리에 관한 깨달음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확장해 나가다 보면 누군가는 전 시가 촉발하는 더욱 포괄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소리는 하나의 예증이다. 다만 작가가 정밀한 방식으로 질문을 다듬고 가설을 전달할 수 있는 주요한 통로인 것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밀려와 급속하게 자리잡게된 프레임이 사람들의 일상과 예술의 양태를 규정하고, 그것들이 다시 여러 분과로 나뉘고 합쳐지는 과정 속에서 누락되거나 뭉개진 채 묵인해 온 것들이 어디 소리와 음악뿐이었을까. 식민지 일본을 통해 이식되고 번안된 서구식 제도에 발맞춰 적절한 매칭 관계를 이루지 못한 삶의 습속과 막다른 곳에 몰렸을 어떤 것들을 추론해본다. 그 과정에서 마땅한 이름표를 얻지 못한 것들, 대충 끼워 맞춰진 것들, 오역된 채 경화된 개념들, 오선지 안에 들어오지 못한 음계, 서술이 불가능한 잔향과 잔흔들을 기어이 찾아내어, 재생 버튼을 누르는 일은 누구의 몫일까? 복원과 복각이 목표가 아니라면 어떤 종류의 예술적 회생과 상상이 필요한가?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그러한 실천을 어디까지 미술의 일로 수용하고 미술관 안팎에서 소통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김영은, <소리의 틀> 전시전경, 송은미술관, 2022


이지원 전시 협력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를 ‘소리를 옮기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한 질문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옮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말 그대로 지정학적 이동, 악보 공간에서의 기호화 혹은 음향 기술 차원의 이동성일 수 있다. 그러나 소리 자체는 운반 가능한 상태의 물질이나 매체도, 완전하게 기록될 수 있는 성질의 정보도 아니다. 그 자체로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하나의 물리적 현상일 뿐이다. 소리를 음으로, 음악으로, 음악학의 위상으로 위치 전환할 수 있는 제도로써 악보와 녹음 기술, 연주와 재생에 관한 국제적 표준과 전문가 집단 의 동의가 있을 수 있다. 도입부의 작업 〈청음 훈련〉과 〈밝은 소리 A〉는 자연 상태의 소리를 제도적인 음계와 박자로 치환하여 듣고, 악보 형태로 표시하는 훈련 과정과 국제적 표준음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연출된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합의된 악보 표시와 악기 사용, 기술적 연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세계의 복잡성과 개인의 인지 특수성을 역설적으로 깨 닫게 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온갖 종류의 소리 정보들이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되고, 그 무엇으로도 조작 가능한 음원 소스가 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소리의 총체성이나 맥락을 보존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오선보 이야기〉나 〈미래의 청취자들에게〉 연작 역시 긴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변형과 변모를 거듭해온 음악의 역사를 조명한다. 그러나 소리의 이동을 다루는 일련의 작업이 원본의 진실을 강조하고, 누실된 과정을 재건하고자한 의도에서 제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오히려, 청취의 행위가 주체의 보완과 해석, 판별과 통합을 요하는 역동적 과정임을 일깨워 준다. 의심이나 저항 없이 수용된 감각과 지식의 틀 바깥에서 작동해 왔던 것들, 너무나 미묘해서 결코 표현될 수 없는 감각, 흩어지는 메아리처럼 운동하는 예술적 상태에 관한 어떤 제유를 전시장 문을 나서, 시간의 바깥에서 되새김질 해보게 된다. 

김영은, <청음훈련>, 송은미술관, 2022

세상에 편재하는 온갖 것을 ‘가시, 가청’의 범주에 가둬 놓는 근대화 프로그램에서 우리가 얼마만큼 자유로워졌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귀에 착 붙도록 설계된 오늘날의 상업 음악과 한 세기에 걸쳐 토착화된 이국의 전통 음악들, 우리 문화의 일부로서 자리 잡은 서양 고전음악, ASMR로 대변되는 사물의 소리를 떠올려 본다. 오늘날 소리의 틀은 더욱 빠른 기세로 증식되고, 분화되어 우리의 음악적 귀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규명하는 것이 더욱 어 렵게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청취’의 행위는 오늘날 더욱 유효한 자기 훈련일지 모른다. 전시는 소리의 틀 짓기 과정을 역으로 도해해 나감으로써, 세계의 구성과 감각의 획정 방식을 에둘러 고하고 있다. 서로 다른 시공에 흩어져있는 소리를 이어긋기 하며, 새로운 발견을 해 나가는 작가의 여정을 따라가는 동안, 각자의 귀는 얼마나 넓어지거나 뾰족해졌을까. 시대가 정해놓은 소리의 틀과 각자가 구축한 청취의 각이 서로 어긋나는 경험이었기를.


김영은, <눈물젖은 트위스트>, 송은미술관, 2022






*Images from 

 https://songeun.or.kr/ko/exhibitions/2022-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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