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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2006), 가장 슬픈 판타지 동화

판의 미로 속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by 이자성

Prologue.

수 많은 영화 평론가 중에 점수가 짜기로 유명한 이가 있다. '박평식' 10글자가 채 안되는 평과 지독하게 짠 점수로 유명하다. 대중에게 찬사를 받은 작품도 그에게는 3점이 대부분이다. 이에 수 많은 안티가 존재하는 평론가이기도 하다. 물론 이같이 높은 그의 영화를 보는 안목(?)에 그의 높은 점수는 영화에 대한 신뢰도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우스갯소리로 "박평식이 7점 줬다. 이 영화 보러가자"라는 말이 있기도 하다. 그 만큼 그의 짠 영화 점수로 인해 생긴 공신력은 은근히 설득력이 있다. 박평식을 믿고 선택했다. 영화 '판의 미로'이다.


movie_image-12.jpg (포스터를 이런 꼴로 만들어놓으니 또 다른 해리포터인줄 알지.)


겉으로 드러난 포스터는 해리포터를 연상케한다. 영화 개봉 당시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을 통한 판타지 영화가 유행할 당시였다. 판의 미로 포스터 역시 시대의 흐름을 이어나갔다. 안타깝게도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을 기대하고 간 이들은 많이 실망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장르는 판타지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위한 판타지는 아니다. 그것이 이 영화에 대한 잘못된 평가를 내리는 관객의 해석이다. 정부군과 혁명군이라는 전시 상황의 암담한 현실 세계와 판의 미로가 보여주는 그 세계에선 '동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기대해온 판타지 장르의 정석을 답습하지 않는다. 오히려 판타지라는 장르에 있어 '슬픈 동화'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결국 자신만이 멋대로 정해놓은 '판타지'라는 정의 속에 맞춰지지 않는 이 영화는 그들에게는 실망적이었으며, 불쾌함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판타지 영화가 아이들만을 위한 영화였는가. 신비한 요술과 이색적인 세계관 속에서 펼치는 주인공이 활약상만을 기대하기엔, 판타지는 현실배경으로는 어려운 메시지 전달과 자각을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장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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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이들이 오필리아의 지하궁전이 현실인지, 아니면 꿈인지 갑론을박을 벌인다. 그러나 정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필리아가 미쳤는지 안미쳤는지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상상이든 아니든 오필리아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현실이 눈 앞에 있었던 것을 인지해야한다. 어린 소녀가 받아들이기에 세상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동족과 다른 이념 아래 서로를 고문하고, 죽이고, 이를 피해 도망다니는 것이 삶이라 칭송되는 때.차라리 자신을 공주라고 불러주는 동화같은 세계가 그녀에겐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오필리아는 그 불행한 세계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녀의 간절함을 통해 판을 만난 것이다.


오필리아는 결과론적으로 그녀가 바라던 지하궁전으로 갔다. 그 곳에서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자신을 위한 궁전이 있다. 현실에서의 모든 부족분을 그녀의 지하궁전에서 채울 수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세상에 그녀는 도달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이 영화가 관객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마지막 엔딩씬의 대사는 "그녀가 지상에 남긴 흔적들은 어디를 봐야하는지 아는 자들에게만 보인다고 한다."였다. 그 후 그녀의 옷을 걸었던 죽은 나무가지에는 새로이 꽃이 핀다.


오필리아는 현실을 거부했다. 그녀가 바라는 이상과 방향은 뚜렷했으나, 현실이 그녀의 시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엄마의 병을 고치기 위해 침대 밑에 둔 매드레이크는 그저 현실의 어른들이 보기에는 정신나간 행동에 불과했다. 현실은 그녀를 거부했고, 그런 그녀에게 눈 앞에 놓이는 현실은 자신에 대한 고통의 삶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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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현실을 더욱 강조해주는 것은 대위이다. 그는 권력과 지위 명분에 종속되어 있는 인물이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아들의 탄생을 지켜보기 위해 아픈 임산부를 무리하게 오게끔하고, 죄 없는 농부들을 자신을 귀찮게 했단 이유로 죽인다. 항상 시계를 보며 칼 같은 행동을 원하는 등 전형적인 권력에 중독된 이이다. 올바르지 못한 가치관으로,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죽기 직전마저도 그는 명분을 세우고 싶어하고, 아들에게도 자신의 가치관을 남기고 싶어하지만, 메르세데스에 의해 차단당하며 결국 그 자리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고 만다.


메르세데스 측의 반란군이 승리했어도, 그 누구도 기뻐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들 역시 그들이 봐야할 곳, 즉 방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필리아의 엄마는 말한다. "세상은 요정이야기와 같지 않다. 가슴 아프겠지만 세상은 잔인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반란군이든 대위든 엄마든 진짜 봐야할 곳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현실에 마주한 상황 속에서 타개하려 하며, 권력과 명예, 지위에만 의존할 뿐 그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방향을 가진 이는 오필리아 혼자였던 것이다. 참된 진리를 탐한 것은 오필리아뿐이었다. 오직 친절이 가득한 자신의 상상 속 세상만을 동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를 봐야하는지 알고있는 자. 즉, 진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아는 자만이 오필리아의 지하궁전이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대위와 메르세데스의 반군처럼 방향없는 행동을 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봐야한다.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거나. 혹은 방향 없이 내 가치관을 잃어버린 채 현실에 안주하고 방황하고 있는지.



판의 미로

어쩌면 판이 만든 미로는, 방향을 헤메고 있는 우리를 뜻함이 아니었을까.




Written by J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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