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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믿 Oct 13. 2023

25.5의 방황

결정 없는 삶


별다른 생각 없이 흘러왔다.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어 엄마가 원하는 간호학과에 진학했고 졸업했다. 나고 자란 곳을 벗어날 생각이 없어 지역 내 제일 큰 3차 병원 한 곳에만 원서를 내고 합격했다. 3월에 바로 출근하라는 문자가 왔지만 잠시 쉬고 싶어 발령을 한 번 연기했다. 언제 즈음 문자가 오나 오매불망 기다리다 보니 9월. 더 쉬고 싶은 욕심을 거두고 병원으로 발을 옮겼다.


잔뜩 부풀어 올랐던 두려움과 불안이 무색하게 첫날은 교육으로만 이루어졌다. 교육 전담 간호사 선생님들은 친절했고, 교육의 내용 또한 어렵지 않았다. 옛날에 비해 많이 바뀌었구나, 두려운 곳은 아니구나. 나름 안심할 수 있었다. 첫 일주일만은. 여유롭게 다닐 수 있는 기간이 그 일주일이었다. 수첩에 메모하기에는 너무 많은 정보량. 어떻게든 건져 올린 내용도 어지러울 정도로 많다. 허겁지겁 집에 와서 정리를 끝내면 취침 시간이다. 불행히도 나는 기록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이 아니다. 정보들을 숙달해 실제로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수면 시간을 줄여서 외우다 보면 머리가 뜨거워진다. 지끈거리는 후두부를 베개에 갖다 대어 봤자 잠에 들 수는 없다. 콩닥이는 심장을 깊게 들이쉰 호흡으로 진정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의식을 잃을 수 있다.


시간은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다. 쉬이 잠들지 못했어도, 중간에 몇 번이나 잠에서 깨어나도 그렇다. 예외는 없다. 그 무정함에 서운함을 느낄 새도 없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정신이 없기에 차를 타고 운전하는 20분이 더욱 달콤하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은 채 그저 단순하게 엑셀과 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돌린다. 새벽 5시. 장막이 아직 걷히기 전. 아스팔트는 더욱 꺼멓고 신호등은 더욱 빛난다. 직원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병원으로 가는 짧은 거리.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고동 소리도 더욱 짙어진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해야만 하는 일들이 늘어난다. 미약한 해마는 방대한 정보를 담아내지 못하고 흘려낸다. 놓치는 일들이 생겨 자꾸 혼나고 말지만 가장 나를 미치게 만드는 건 따로 있다. 딜레마다. 아직 교육을 받는 입장이기에 책임지고 업무를 보지는 못한다. 다만 실제 일하고 있는 선생님들께 물어보고 일을 해야 한다. 교육을 담당하는 선생님은 무조건 해보라고 말하고, 환자를 보는 선생님들은 바빠서 우리를 귀찮아한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부정적인 반응을 얻을 수밖에 없는 딜레마. 이것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한 달의 마지막 즈음. ‘그만둘까?’하는 생각이 처음 머릿속에 떠올랐다. 운동을 하면서 들인 습관이 있다. 심호흡이다. 이완할 때는 코로 숨을 들이쉬고, 수축할 때는 입으로 숨을 뱉는다. 이를 반복하다 보니 심호흡을 할 때도 날숨은 입으로 뱉고 만다. 교육 선생님이 뭔가를 해보라고 시킬 때마다 지나친 긴장에 나를 경직시켰고, 반사적으로 심호흡을 했다. 코로 들이쉬고, 입으로 내뱉고. 이가 한숨 쉬는 걸로 보였나 보다. ‘한숨 그만 쉬어라’는 말을 듣자, 잠깐 세상이 멈춘 듯했다. 그리고 이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우니 생각은 비대해졌다. 이어서 그만두고 다른 일을 시작하는 내가 떠올랐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떤 일을 시작할지 막연했음에도.


이번 달 근무는 단 하루가 남았다. 하루만 더 다녀보고 결정하자. 그렇게 다짐했고 결정했다. 그만두기로. 그 하루는 역시 달라진 게 없었고, 내 마음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담담하게 내뱉었다. 그만둘 거라고. 태어난 지 25년 하고도 6개월. 만 25.5살. 방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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