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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믿 Oct 14. 2023

드디어 넘는 고비

안일함에 안주하다


그만두겠다는 말에 크나큰 반대는 없었다. 부모님들은 내가 원체 고집이 세다는 걸 알기에. 허나 간접적인 반대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만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퇴사상담을 했을 때 마음을 돌려서 계속하기를 바랐다. 그만둔다면 건강보험공단 시험 준비를 하든지, 요양병원이라도 다니면서 임상 경력을 쌓자. 그런 말들. 일단 수긍하는 척했다. 안 그래도 그만두는 것에 충격을 받았을 터인데, 그런 중재안들마저 거부한다면. 아니, 울어서 수긍하는 척했다. 엄마가 우는 것에 이골이 난 터라 일단 그렇게 반응했다.


첫날은 그렇게 넘겼다. 다만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같은 반응이 이어졌다. 듣다 보니 짜증이 일었다. 왜 그만두었는지, 그러면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런 말은 일절 없었다. 다만 ‘계획은’이라는 말로 일축될 뿐이었다. 그 순간이 고통스러워서, 그리고 벗어나는 순간을 상상하니 가슴이 두근거려서 나왔다. 그렇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늦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찾아볼, 그리고 시도해 볼 수 있을 만한 틈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다시 한번 내뱉었다. 요양병원이고, 시험이고 지금 당장은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여기서 내뱉지 못한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내가 싫어하는 일을 계속해야만 했다.


궁금할 수도 있다. 고집이 센데 왜 간호학과를 벗어나고 싶다는 내 뜻을 관철하지 못했나 하고. 집안 사정, 그리고 나의 안일함 때문이다. 돈은 지나치면 문제가 되지만, 부족하면 크나큰 문제가 된다. 특히 책임이 무거울수록 더욱 그렇다. 그 책임을 지고 있는 아빠가 실수를 했다. 긴 시간에 걸쳐 토토 같은 도박을 했나 보다. 가족 모르게 낼 수 있는 빚은 모두 만들어 날려먹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 앞에 억 단위의 빚이 생기고 말았다. 당장에 우리 집이 무너진 건 아니지만, 분위기는 풍비박산이 났다. 죄책감과 슬픔, 우울 속에서 헤엄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당차게 간호학과를 그만두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떠나겠다. 휴학을 하고 무언가 시도를 해보겠다. 외칠 수 없었다.


내가 안일했던 탓도 있다. 좋지 않은 집안 사정 속에서도 따박따박 용돈을 타 쓰면서 알바 한번 하지 않았다. 학교 생활만 한다면 여가시간이야 충분히 낼 수 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3학년 여름방학부터 무언가에 손을 대보기 시작했다. 일러스트레이터, 포토샵, 프리미어프로, 애프터 이펙트, 그림, 기타 등등. 다만 말 그대로 손을 대보기만 해 봤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겠다는 목표 없이 배우는 과정 자체에 집중하다 보니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학교 조별과제에나 일러스트레이터를 활용해 포스터를 만들어 봤을 뿐이다. 장난 삼아 합성을 하고, vlog를 만들고, 왼쪽 손끝에 굳은살이 내려앉았을 뿐이다. 결국 시도는 해보지 못했다. 내게는 취업이 보장되어 있다는 보험 또한 안주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다. 이렇게 쉬어도 내 인생이 꼬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렇게 첫 출근이 도래했다.


어라, 내가 생각했던 정도의 고통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고통에 뜨거운 냄비에 닿은 사람처럼 손을 허겁지겁 떼어냈다. 그러자 시도하지 않았던 나 자신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더불어 나를 이 방향으로 이끈 부모에 대한 불평 또한 어찌 피어나지 않을까. 허나 이렇게 다짐했다. 결국 어떠한 영향을 받았을지라도 결국 선택한 것은 나라고. 최종 결정권자는 나라고. 그렇기에 부모는 어떠한 책임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그만두는 것 또한 나의 선택이며, 부모가 강제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결국 고통에 대한 충격으로 등 떠밀리고 나서야 시도하기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내뱉었다. 시도를 해보고 싶다고. 무엇을 시도하고 싶은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가장 오랜 기간 품어온 꿈. 글로 무언가를 성취해보고 싶어졌다. 그래. 첫 글에서 별다른 생각 없이 흘러 왔었다.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생각은 있었지만 말로 내뱉지 못했다. 실천하지 못했다. 그 커다란 고비를 드디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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