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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믿 Oct 23. 2023

믿음이란

친구와의 대담

어느 날 친구가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장난으로 한 질문은 아닌 듯해,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되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는다는 게 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개념 자체에 대한 질문이라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이 감정을 표현하고자 ‘사과는 뭘까?’라는 질문을 받은 듯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의 생각이 이어졌다.


사과는 존재 자체가 증명이 된다. 눈에 보이니까. 하지만 믿음은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감정도 내가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나는 살면서 무언가를 100% 믿은 적이 없다. 100%가 있다면 그건 사실이다. 실로 공감되는 의견이었다. 나 자신도 믿음을 입증하라면 이내 포기했을 테니까. 당시에는 떠올리지 못했지만 이런 의문도 들었다. 결국 이러한 의심들이 있기에 믿음이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100% 믿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믿음이라는 개념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의심에 대항하고자 믿음이라는 개념을 만들지 않았을까.


나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하기 전, 종교를 믿는 친구와 대화를 나눴었나 보다. 친구의 친구에 의견은 이러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또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주시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믿을 기회가 있지만 그 사람들이 스스로 거부하고 있다. 듣자 2가지의 의견이 떠올랐다. 신은 믿지 않는 사람까지 끌어안을 정도로 포용력 있지는 못하구나. 또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구절은 선민의식을 연상시키는구나, 하고. 내 친구도 이러한 의견들에 동의를 하지 못한 채 나에게로 온 듯했다.


당장에 믿음에 대해 정의 내릴 수는 없어서 믿음의 역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지속적인 동기가 되어줄 수 있는 수단이다.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 무언가를 하겠다는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감정은 결국 일시적이기에 지속적인 원동력이 될 수 없다. 믿음이라는 건 사실 아무런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걸 굳게 간직하는 순간 쉼 없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걸 믿지 않으면 꿈에 가까이 갈 수 없다. 이렇게.


내 말을 곱씹더니 입을 떼었다. 자신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종교적 관점에서의 믿음이었다고. 종교에서의 믿음은 설명이 불가능한 그 믿음 그 자체다. 그렇게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지금 당장은 종교가 사업이라고밖에 생각 들지 않고, 자신이 종교를 믿는 순간은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이성을 이기는 순간일 듯하다. 이런 발언들에서 그러한 감정을 유추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는 뜻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신념의 영역이라 말로 바꿀 수는 없다. 종교에서 비롯된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으로 이루어진 무형의 가치 중 하나가 ‘종교’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또, 종교적 믿음으로 실제 가치를 창출하는 경우도 있기에 마냥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친구도 수긍했다. 하지만 그건 종교가 긍정적으로 작용한 사례지 신이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며. 종교를 믿는 부모님 아래서 자라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경험해 봤던 모양이다. 역시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사람한테 하는 훈계만큼 쓸모없는 게 없다. 강요는 대부분의 순간에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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