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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믿 Oct 17. 2023

글이어야만 하는 이유

지금은 모르지

그렇게 이유를 부르짖었으니, 또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찾아야만 한다. 만들어내야만 한다. 풍파가 닥쳤을 때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이유를. 글을 쓰는 이유를.


글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 보자. 아마 초등학생 저학년 즈음이었던 듯하다. 수업 중에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 왔었다. 어떻게든 완성한 글을 급우가 보고서는 ‘잘 쓴다’고 말했다. 사실 이 ‘잘 쓴다’ 부분 말고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머지 부분은 뇌가 스스로 만들어낸 가짜 기억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그때의 감정이 얼마나 비대했는가’다. 과거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몇 안 되는 어릴 적 추억이니.


그다음은 중학교 때다. 라이트노벨이라 불리는 소설들을 즐겼다. ‘라이트노벨’, 말 그대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배경과 사건보다는 인물. 그중에서도 ‘모에’와 같은 요소를 강조한 캐릭터성이 주가 되는 소설이었다. 향유하다 보니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때부터 글에 대한 꿈을 조금씩 키워 왔다. 실제로 행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흘리는 일 없이 품에 간직했다.


고등학생 때는 고민을 해봤다.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연습을 해야 할까. 유명한 격언이 있다. ‘다독, 다작, 다상량’. 이를 바탕으로 연습을 해보자, 그렇게 마음먹었던 듯하다. 생각이야 원체 많았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독’과 ‘작’은 달랐다.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야자 시간에 몰래 소설책을 읽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소설은 써보지 못했다. 당장 시도하기에는 많이 두려웠기에.


마지막이 ‘인스타그램에 에세이를 써서 올리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깐 해봤을 뿐이다. 이 시기에 브랜드 스토리를 써달라는 요청이 온 적이 있다. 승낙하고 성심성의껏 써봤지만 끝이 아쉬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10년도 넘게 간직했던 꿈이지만 참으로 한 게 없다. 꿈이라고 불러도 될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덧붙이자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주는 편안함도 있다. 어떠한 감정적 동요가 찾아와도. 담담히 묵힌 다음에 활자로 풀어내면 평온해진다.


좋다. 모두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뭔가 부족하다. 반드시 글이어야만 할 필요가 있을까. 글을 그저 취미로서 즐길 수는 없을까. 그에 대한 답은 요원하다. 하지만 작금에서야 깨달은 사실. 해보기 전에는 모른다. 단순한 글로는 알 수 없는 현실이 있다. 그 사이의 방대한 맥락을 알 수 없다.


CPR을 예로 들어 보겠다.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주변 환경을 사정하고 다가가서 의식 확인을 한다. 주변 환경이 위험하다면 환자를 옮겨야 한다. 어깨를 두드리고 말을 걸어서 확인한다. 의식이 없다면 지나가는 사람을 정확하게 짚어 119를 호출하고, 제세동기를 가져와 달라 요청한다. 그 뒤 5~10초에 걸쳐 호흡과 맥박을 확인한다. 경동맥에 손가락을 댄 채로 시선은 가슴 쪽에 둔다. 맥박이 촉지 되지 않고 가슴이 오르내리지 않으면 바로 가슴압박을 실시해야 한다. 복장뼈를 절반으로 나눈 아래쪽에서 다시 중앙을 찾아 5cm 깊이로 분당 100~120회로 압박해야 한다.


말로 풀어놓으니 되게 간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로 행해보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주변 환경이 위험해 환자를 옮기려 할 때 어떻게 옮겨야 하는가? 경추가 손상되어 고정이 필요한 경우에는 차라리 옮기지 않는 편이 나은가? 주변에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화를 하면서 가슴압박을 해야 하는가? 복장뼈의 전체 길이는 어떻게 확인하는가? 5cm가 압박되는지는 어떻게 확인하지? 분당 100~120는 또 어떻게?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변수들이 찾아온다. 이는 실제로 행해보아야지만 알 수 있다. 가슴압박이 체력을 얼마나 소모하는지도 실감할 수 있다.


그렇다. 글을 쓰는 진정한 이유는 지금 알 수 없다. 내가 만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글로 표현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글을 쓰는 이유를 찾기 위해. 막연한 꿈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실패를 통해 납득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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