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영화 잡지 전성시대
2003년 늦가을쯤이었다. 무비위크에서 운영(?)하는 다음 카페에서 장준환 감독 팬미팅회를 연다는 글을 보게 됐다. 지금은 장준환 감독이 '1987'이란 흥행작을 만들어 유명해졌지만, 당시엔 그해 4월 개봉한 '지구를 지켜라'란 영화로 이름이 좀 알려진 신인감독이었다.
내 경우엔 장준환 감독이 한국영화아카데미 시절 만든 단편 영화인 '2001 이매진'을 아주 인상 깊게 봤고, '지구를 지켜라'가 개봉했을 때 그 단편을 만든 감독이란 사실에 매우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2001 이매진'은 봉준호 감독이 촬영을 하기도 했던 1994년 작품인데 EBS에서 단편영화를 틀어주는 주말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봤었다. 당시 나는 영화에 아주 관심이 많은 청소년이었고, 매달 '스크린'이란 영화잡지를 정기구독하기도 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시 시험 기간엔 오전에만 학교를 가니, 오후엔 비디오가게에 가서 그동안 못 봤던 영화들을 계획표를 짜서 보곤 했다.(하라는 공부 안 하고 영화 보고, 책과 잡지만 읽어서 부모님한테 많이 혼나던 10대 시절)
아무튼 그 '2001 이매진' 감독이 만든 장편 데뷔작이고 신하균이란 배우도 처음 본 영화였고, 여러 면에서 내겐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그런 작품들을 만든 장준환 감독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라고 하니, 팬미팅 장소에 큰 기대를 가지고 나갔었다.
막상 팬미팅을 한다는 호프집(아무튼 술을 파는 곳)에 가보니 영화사 관계자와 카페 운영진 등 3~4명,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다는 대학생 1명, 그리고 나, 장준환 감독. 이렇게 6~7명이 모인 사람의 전부였다.
팬미팅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진짜 팬은 나 1명이고 다른 대학생 1명은 '지구를 지켜라'에서 감독이 의도한 노동운동적 시각이 궁금해 온 것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장준환 감독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내가 좋아하던 영화에 대한 얘기들을 할 수 있어 정말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평소 관심이 있던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대한 궁금증도 장준환 감독에게 많이 물어볼 수 있었다.
사실 20년 넘게 시간이 지나 무슨 말들을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딱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면 "뭐든 많이 찍어봐라"라고 했던 장준환 감독의 조언이다.
그 지점에서 내가 영화감독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글을 쓰는데 취미가 있었지만, 뭔가를 찍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굳이 장준환 감독과의 21년 전 만남을 길게 쓴 이유는 당시 20대였던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던 영화잡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군대를 제대하고 막연하게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던 그 시기에 영화잡지는 내게 교과서와 같은 중요한 자료였다. 그 속에선 영화인들의 얘기와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를 담고 있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고향까지 가려면 강원도 인제에서 버스 타고 동서울터미널까지 2시간, 동서울터미널에서 다시 우리 집까지 2시간 등 총 4시간이 걸렸다. 그 4시간이 늘 즐거웠던 이유는 터미널에서 사보던 '무비위크' 등 영화잡지 덕분이었다.
특히 2001년 창간한 무비위크는 기존 잡지에 비해 좀 더 가볍고 신선한 내용과 세련된 편집, 표지 등이 참 마음에 들었다. 시네21이나 키노 등이 영화를 좀 더 심도 깊게 다루고 아카데믹한 느낌이라면, 무비위크는 가볍게 읽기 참 좋은 잡지였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 영화 잡지가 설자리는 급격히 좁아졌고 2012년 폐간되며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아마 무비위크라는 잡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40대 이상에만 일부 남아있을 듯하다.
'스크린'도 중학교 때부터 군대 가기 전까지 정기구독을 했던 영화 잡지다. 무비위크보다는 가격이 더 비쌌고, 월간지라 판형도 크고 더 두꺼웠다.
경상도 시골에 살고 있던 내게 인터넷도 없던 1990년대 초중반에 영화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가 '스크린'이었다.
스크린엔 인터뷰 기사도 많이 실렸는데, 가장 기억이 남는 인터뷰는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 등으로 유명한 일본의 거장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인터뷰였다.
1996년 또는 1997년에 실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1998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말년에 한국 매체와 한 거의 마지막 인터뷰가 아니었을까 싶다.(요즘 가끔 드는 생각이 정말로 유명했던 인물들이 한때는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인터뷰 마지막 질문이 '영화감독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감독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조언한다면?'이었는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답은 "시나리오를 매일 써라"였다. 그는 촬영을 잘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많지만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시나리오를 써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따라서 네가 좋은 시나리오를 쓸 수 있다면 언젠가 감독도 될 수 있다.라고 답했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매일 뭔가를 쓰려고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시나리오를 완성하지도 영화감독이 되지도 못했다. 물론 여전히 나는 언젠가 열심히 뭔가를 쓰다 보면 내가 쓴 스토리가 영화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꿈꾸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