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
얼어붙은 마음은 봄햇살을 등에 업어도 녹지 않는다. 가슴이 답답해서 기차를 타고 달려도 명치가 아프다. 언제쯤 이 가슴병이 없어질지 원. 모든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데 근원이 미결 중이니 정신은 맑아지지 않아 목소리가 낮게 깔리고 말투가 맥이 없어 신상의 어려움이 생겼노라 드러내고 있다. 주말인데 계획이 없다는 것이 답답해 불쑥 기차를 타기로 했다.
차장으로 느껴지는 햇살은 여름 같아서 가리개를 잡아당겨 빛을 차단했다. 기차가 달리고 있는 들판과 산야는 아직 봄기운이 찾아오지 않았다. 이따금 부지런한 농부가 창 넓은 모자를 쓰고 황량한 들판에 거름을 뿌리고 있다. 온누리가 파종을 한 부지런한 손길 덕분에 한두 달 뒤면 푸릇푸릇한 들판이 펼쳐지겠지. 가을 황금들녘까지 그들의 땀방울로 일군 결실이 빚은 위대함이리라.
내일을 계획하고 실천해 가는 것이 내 생활방식이었다. 한 달이 빨리 지나간다지만 다시 시작되는 일상이 있어서 지치지 않고 힘이 솟는다. 그런데 요즈음 내 손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일정이 없다. 하루가 다르게 피어나는 개나리, 매화, 목련이 창문에 매달린 나를 애처롭게 바라본다. 할 일 없는 하루를 벗어나고자 기차표를 예매하고 몸을 실었다. 처음 와 본 역사에 바람이 많이 분다.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증표 같다. 바쁜 세상 한 구석에 나도 들고 온 묵직한 짐을 놓고 서있다.
나를 마중 나올 이에게 줄 선물이다. 이것을 핑계로 두 번째 방문 구실을 삼았다. 불현듯 과거 어머니의 모습이 비친다. 왜소한 몸집에 보따리를 몇 개씩 들고 딸 자취방으로 오셨다. 교통비를 쓸 생각조차 없어 보따리를 저만치 옮겨 놓고 다시 가서 다른 보따리를 이고 들고 릴레이처럼 옮겨가며 나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셨던 어머니.
그 시절은 가능하면 몸은 부리고 돈은 아껴서 채워야 했었다.
어머니를 뵈러 가야 할 때임을 헤아려본다.
한 시간 반을 달려 다른 도시에 오니 기분 전환이 된다.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도 반갑다. 봄기운이 만연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더위까지 끼어든 날이다.
마중 나오는 차가 교통체증에 걸려 쉽게 오지 못한다. 주말 특수 현상일까! 근처에 유명한 대형 쇼핑센터가 있어서 밀리는 길이었다. 지난 추석에 쇼핑 나섰다가 반시간을 막혀 있다 결국은 포기하고 돌아간 추억의 길 위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드디어 마중 나온 차를 탔다. 손에 든 짐이 무거웠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했다. 나의 빈손을 채워준 소중한 것인데 무겁다는 말에 푸대접을 받으면 안 될 일이다.
봄바람을 타고 왔으니 아울렛 매장에 가잔다. 세심한 배려가 깃든 권유다. 속마음을 알기에 덜컥 승낙했다. 쇼핑은 돌고 돌며 눈호강부터 해야 하는데 대폭 할인한다는 광고에 덥석 물어버렸다. 푸른빛이 봄옷으로 내 맘을 흔든 것이다. 내 옷은 매장 들어간 지 10분 만에 결정하고 자유롭게 쇼핑하라며 뒤로 물러나 아이와 시간을 가졌다.
가족, 부부 쇼핑객이 많다. 그들의 모습에서 다정함과 행복한 시간을 읽는다. 매장밖 매대에도 물건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쇼핑 가방을 들고 나오는 손님들의 마지막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는 곳이다. 손님이 다가오면 점원의 입과 손길이 바빠진다. 입어 볼 것을 권하고 옷매무새를 만져주기도 전에 벗고 떠난다. 5초 안에 매력을 발산해서 호기심이 생기게 해야 할 것 같다. 다른 옷을 들고 권하려 하면 벌써 계단을 내려서고 있어 또 허망한 순간만 붙잡는다.
하루의 보람을 어떻게 찾을까! 몇 명의 손님을 응대했느냐, 몇 벌의 옷을 팔았느냐, 몇 벌의 옷을 다시 정리했느냐. 기준이 뭘까 혼자 저울질한다. 상거래는 물건이 팔리고 수입이 탄탄해야 보람이 있을 텐데. 근무 중 서성거리는 점원의 두 다리에 힘이 솟을 일이 있기를 기원해 본다.
삶의 현장에서 잠시 무료함을 잊고 나의 앞날을 계획해 본다.
손주는 지칠 줄 모르고 몇십 분째 유모차를 밀며 같은 길을 오간다. 한 걸음이라도 더 밖으로 나갈까 봐 밀착해서 따라다니니 현기증이 난다. 짧은 다리는 지칠 줄 모르고 반복의 재미에 빠졌다. 매장 문이 열릴 때마다 쇼핑을 마친 식구인가 싶어 눈길이 간다. 무료했던 하루가 꽉 찬 알곡처럼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