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잘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짧은 시간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을 테니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쏟아지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아까 아주머니께 열심히 눈총을 받은 청년입니다. 저로서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줄 알고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두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제가 다른 사람에 비해 보폭이 조금 넓다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걷는 속도가 다소 빠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유일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이 걷기이기도 한 이유입니다.
제가 퇴근하는 길을 가다 보면 아주 좁은 보행자 통로가 나옵니다. 사건도 그곳에서 일어났죠. 평상시에도 두 명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곳이죠. 그 보행자 통로 옆에는 2차선 도로가 있습니다. 이제 기억하시나요? 그런 곳에서 아주머니께서는 열심히 저보다 앞서서 걷고 계셨습니다. 웃기게도 저는 아주머니의 손과 바지에 시선이 계속 꽂혔습니다. 우산을 잡은 손은 오른손, 왼손은 꼿꼿이 편 채로 열심히 걸으셨습니다.
손가락 끝에 힘을 잔뜩 주셔서 곡선을 그리며 하늘을 향하게 하셨는데 그 모습이 마치 비를 지휘하는 지휘자 같았습니다. 꼭 물을 마실 때 새끼손가락을 펴고 마시는 것처럼 시선강탈 포인트였습니다. 거기에 다른 사람보다 빠른 걸음으로 당당하게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꼭 앞으로는 손 끝이 하늘을 향하듯 제 있는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살겠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살아라.
바지의 경우 보려고 본 것은 아니라 너무 좁은 통로라 반대편에서 사람이 오기라도 한다면 우산끼리 부딪히지 않게끔 상황을 잘 응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비까지 그렇게 억수로 쏟아져서 시야까지 방해되는 때에 정면을 안 볼 수는 없었고, 정면에 반바지의 아주머니가 수 분 동안 계셨습니다. 그리고 바지에 눈이 갔습니다. 바지 뒤편은 애매한 위치에만 물이 튀어서 참 우스운 형세였습니다. 하필 반바지인지라 파워워킹하시는 다리와 비교가 되니 더 재밌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교훈을 등과 뒤통수로 말씀하셨지요.
비 오는 날은 면바지를 입지 말아라.
고맙습니다. 의도하지 않으셨겠지만 저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비 오는 날은 면바지를 입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러는 중 맞은편에서 할아버지 무리가 오는 것을 우리 둘 다 보았을 것입니다. 꽤 많은 분께서 오고 계셨지요. 우리가 걷는 속도와 할아버지들이 다가오는 속도로 보았을 때 우리는 저 앞 큰 배전기에서 만날 위기였습니다. 다들 우산까지 들고 있던 터라 한 명이 지나가기도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할아버지들은 술까지 드신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아주머니께서는 그때도 폭풍 파워워킹으로 거센 물살 만들며 헤쳐 나가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들의 우산과 부딪히며 물회오리를 만들었죠. 그리고 그 물방물들은 온 세상으로 튀어나가면서 자신들은 빗방울로 끝나지 않고 새롭게 재창조된다는 것을 단단히 알렸습니다.
대개 우산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긴바지라면 바지 부분부터 하반식 전부를 포기해야 할 정도의 비였습니다. 조금 과장을 더해 발목까지 물이 찼으니까요. 그러면 온몸에 30%는 물에 젖은 꼴이 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우산을 쓰는 것은 나머지라도 젖지 않기 위함이겠지요. 우산은 비를 완전히 막아주는 물건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저 비에 최대한 덜 맞게끔 상의와 머리를 지키기 위한 도구겠지요. 하지만 아주머니께서 만드신 물회오리는 제 상의 전체에 튀어 물자국을 만들어주었고, 얼굴에는 미스트질을 해주었습니다. 적어도 로션은 필요 없는 날이겠습니다.
역시 선행은 남들 모르게 하라고 했지 않겠습니까. 저에게 촉촉함을 선물해주고 떠나는 비에 애매한 위치가 젖은 바지의 뒷모습은 세상 멋짐을 뿜뿜 품기면서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게임이나 만화였다면 아마 총총거리는 이미지의 CG가 쓰였을 것입니다.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좋은 선례를 만들어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선행은 남들 모르게 하라.
참고로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배가 고팠습니다. 9시간을 열심히 일하는 신입직원이야 말로 다음 세대의 일꾼으로서 밥을 잘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보폭을 더 넓혔습니다. 그리고 몇 초 후 다시 아주머니의 면바지를 눈앞에서 만났습니다. 반가움에 인사라도 드릴라고 했지만 관계는 비단 상호작용 아니겠습니까. 혼자만의 짝사랑은 그저 지켜만 볼 뿐입니다. 그렇게 또 일정 시간이 지나니 저도 마음을 접기로 했습니다. 기본적인 식욕에 이성이 지배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어쩔 수 없이 더 속도를 내자고 판단했고, 보폭을 늘렸습니다. 면바지를 영영 떠나보내기 위해서. 그러다가 찬스는 기회처럼 찾아왔습니다.
아주머니는 참 좁은 통로에 정확히 가운데로만 다니셔서 지나가기 애매했는데 옆으로 길이 하나 더 나있는 곳에 도달했기 때문에 피해 갈 공간이 생겼습니다. 아참, 앞으로는 꼭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겠습니다. 면바지는 얘기했죠. 정중앙, 중용의 도를 닦으라고. 단 한 번도 빗나간 적 없이 중앙의 길만 걷는 모습에 감탄했습니다.
어디든 치우치지 말고, 중용의 길을 가라.
여하튼 추월차로는 1차선이니 왼쪽으로 피해야 하기에 저는 열심히 차도 쪽으로 나갔고, 아주머니를 앞서기 위해 돌진했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도 만만하신 분은 아니셨습니다.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원 속도를 유지하셔서 끼어들기가 참 애매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속도를 유지하며 계속 차도 갓길에서 걸었습니다. 그런데 갓길에는 배수로가 있습니다. 물 수위가 너무 높아서 속도가 안 났습니다. 바지에 물이 엄청 튀더라고요. 차들은 2차선에 지나기도 빡빡했던 터라 저에게 크락션을 연신 눌러대더라고요. 오래 살고 싶었습니다. 헌신도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신입사원이지 않습니까. 앞으로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일나무가 아니겠습니까. 급하게 방향을 틀어 인도로 올라갔습니다. 하필 그곳은 가로수가 애매하게 식재되어 있어서 나무와 우산이 부딪혔습니다. 저도 평상시에는 잘 피해 다닙니다. 제 몸의 크기가 지나다닐 수 있는 곳 정도는 압니다만, 하필 그 우산을 처음 쓴 날이고, 또 그렇게 큰 우산인지라. 우산을 든 저는 이번 생에 처음이라. 죄송합니다. 물이 튀었고, 뒤에서는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습니다.
비명만 들렸습니다. 아주머니께서 그다음에 하신 말들이나 그전에 한 욕들은 1도 못 들었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있었고 공교롭게도 bpm이 200 가까이 되는 신나는 노래가 나왔으니 아주머니의 말씀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주머니를 쳐다보고 목례하는 것뿐이었는데. 뒤를 돌아보자마자 죽일 듯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셨습니다.
오랜만에 야생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차가 꽉 찬 2차로, 사람들과 우산으로 북적대는 보행로. 온갖 건물들이 즐비한 곳에서 야생을 만났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제가 보기와는 다르게 벌레를 굉장히 무서워합니다. 물론 벌레도 저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존감을 낮추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당당하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물며 야생의 눈빛은 얼마나 저를 공포감에 들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목례만 하고, 노래 음량을 올리고, 스퍼트를 올려 야생의 가젤처럼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너무 빠르면 또 모양 빠지니 살짝 빠르게 걷는 듯한 느낌만 주듯 튀었습니다. 그 뒤에 무슨 욕을 하셨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시긴 하더군요. 뒤통수가 따가운 것을 보니. 그저 건강히 살라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만 하겠습니다.
결국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사과와 감사의 인사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편지를 받게 되실지는 모르겠으나, 제 마음이 잘 전달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남들에게 해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주머니는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앞서 물을 엄청 맞았습니다. 아주머니의 우산 컨트롤로 인해 그리고 제대로 된 사과를 못 받았죠. 모르셨을 테니까요. 그래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상에서 누구나 다양한 선택과 행동을 합니다. 그건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죠. 사회적인 동물이니까요. 그래서 집에 가는 동안 제 행동을 오랫동안 곱씹으며 돌아봤습니다. 혹여나 저 또한 의도와 달리 피해를 준 적이 없는지를요.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적어도 오늘은 웃으시기를.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P.S. 저는 물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군대도 해군을 나왔습니다. 바다에서만 2년 살았습니다. 퇴근길은 지하철로는 10분입니다만 1시간이 넘게 걸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걸어갔습니다. 이미 물을 맞을 각오로 젖기 않기를 포기한 것이지요. 첨벙첨벙, 너무 신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주머니께 물을 맞을 때도 기분은 안 나빴습니다. 최근에 집 근처에 넓은 인공호수가 생겼습니다. 그곳은 수위가 높아서 올여름 도시임에도 인사사고도 발생했죠. 저는 종종 갑니다. 산책로랑 수위가 거의 동일해서 물을 구경하기 쉽거든요. 거기에 비까지 오면 수위에 아슬아슬해지는 그 분위기가 좋습니다. 안 그래도 비 오는 날 그곳에 갈 생각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실제로도 갔다 왔고요. 그래서 신난 상태였습니다. 여하튼 기분 나쁘셨으면 사과합니다만 저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즐기는 미친놈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아, 그리고 오늘 같은 날은 에어컨이 있다면 집에서 쉬는 것도 방법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