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런히 정돈된 이불을 지나 커튼을 젖힌다. 오후 9시, 아직은 파란 하늘. 해는 지지 않았다. 유럽의 여름은 해가 길어서 좋다. 여기서도 야근이지만 다행히도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 생수를 한 통 꺼내 들고 호텔을 나선다.
11년 전 겨울, 처음 파리에 왔었다. 애쉬포드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한 달간 불어난 크고 무거운 배낭을 비좁은 짐칸 겹겹이 쌓아놓은 캐리어들 사이로 겨우 욱여넣었다. 마침내 도착한 파리 북역. 화려하고 정제된 런던과는 달리 지저분하고 어질러진 거리. 나는 그 자유분방한 무질서가 좋았다. 때때로 밀려드는 우울함과 외로움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그 예술적인 분위기가 좋았다. 이역만리 파리는 나의 도시였다.
2017년, 또다시 겨울. 선미와 함께 두 번째 파리에 왔었다. 새해를 맞아 개선문 앞에서 카운트 다운을 하고, 빛나는 에펠을 바라보며 프러포즈를 했다. 차갑고도 매서운 맞바람 때문인지 함께한 5년의 추억과 프러포즈의 감동 때문인지, 알 수 없었던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함께할 미래를 약속했다. 10여 년 전 교양 프랑스어 교수님께서 틀어주신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골목 사이 저 멀리 솟아오른 에펠탑, 그 낭만적인 이미지처럼. 서로 아름답게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약속했다. 파리는 그렇게 우리의 도시가 되었다.
호텔을 나와 영화 속 그곳을 거닐었다. 솟아오른 에펠탑이 보이던 그 골목을. 두 번의 여행과 다섯 번의 출장. 여행과 출장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부유한다. 파리는 나의 로망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로망.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살 수 있을 거라는 로망. 이 팀을, 이 회사를 떠날 때까지 여행과 출장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계속 부유할 것이다. 어디선가 담배 연기가 흘러온다. 에펠탑 아래, 하얀 수염에 선글라스를 낀 할아버지가 시가를 물고선 연거푸 연기를 뱉어내고, 에펠탑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오후 10시, 노을이 지고 있다. 저렇게 수염이 길 때가 오면, 그땐 시가를 펴야겠다. 이 자유로운 도시에서. 자유롭게. 우리의 도시에서. 우리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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