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10월
이튿날엔 차를 빌렸다. 혹시 몰라서 여권과 같이 보관하던 국제면허증을 가져왔는데, 렌트를 급하게 결정했더니 빌릴 수 있는 차가 없다. 다행히 호텔 리셉션에서 업체를 연결해 줘서 길에서 보던 귀여운 베이지 차로 겨우 성공.
가끔 돌발 상황이 생겼을 때 좌우 깜빡이 대신 와이퍼가 창을 닦았던 적은 있었지만, 오른쪽에 앉아 운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차도 별로 많지 않았고 시외로 나왔을 땐 더 한적했다. 날씨가 좋아서 5월, 노르웨이에서 렌트한 차로 공항을 나섰던 순간이 떠올랐다.
다카마쓰가 속한 카가와 현은 우동으로 매우 유명한데, 우동 가게들이 시내보다는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서 우동버스, 혹은 우동택시를 타고 가야만 했다. 갑작스럽지만 렌트를 하고 싶었던 것도 가고 싶을 때, 오고 싶을 때, 원하는 곳으로 오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일정을 미리 생각 안 하고 움직였던 데다 렌트도 곧바로 하지 못했었던 터라 시간이 많이 흘렀다. 네비를 찍어보니 첫 우동 가게 도착시간이 영업종료 직전으로 대기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헛걸음하게 되는 상황에 스트레스 받을까 고민했는데, 다행히도 이 여유로운 다카마쓰에서 내 마음도 여유를 찾고 못 먹으면 어쩔 수 없지, 하는 자비로운 상태를 유지해 주었다.
첫 목적지는 바로 야마고에 우동.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서 봤을 땐 대기 줄이 골목을 돌아 나오도록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다행히 평일이라 여유로웠다. 처음 영상에서 보았을 때 한 번, 도착한 이후 시골 할머니 댁에서 밥을 얻어먹는 것 같은 모습에 두 번. 먹기도 전에 마음을 빼앗긴 곳으로, 생계란과 간장을 풀어먹는 가마 타마 우동은 너무나도 맛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8번의 식사 중 7번을 우동으로 먹었는데, 서로 스타일이 다르고 실제로 대부분 맛있어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주관적으로 나에게 가장 맛있었던 곳을 꼽자면 여기 야마고에 우동의 가마 타마 우동이었다. 일본 음식들은 내 입맛에 대부분 잘 맞고 맛있는데, 특히나 신선하고 깨끗한 생계란을 곁들여 먹는 음식들이 가장 만족도가 높았다. 이번 가마 타마 우동도 만족도가 높았다.
속이 뻥 뚫릴만큼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노란 빛으로 물들어가는 밀밭을 보니, 이번 여행지 선택은 아주 탁월했다는 얘기가 절로 나왔다. 오늘 차를 빌려 나온 것도 너무 잘한 선택이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야마시타 우동. 첫 번째 야마고에 우동 도착시간이 촉박해 차선책처럼 골라놓은 곳이었기도 했지만, 이곳의 우동 가게들은 정식 국그릇 크기의 면이 적은 우동을 팔기에 한 끼에 여러 가게를 돌며 여러 우동을 맛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투어를 돌며 하루에 네다섯 그릇씩 우동을 연달아 먹는다. 하지만 우리는 소화기관이 튼튼하지 않으니 먼저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고 먹기로 했다.
이곳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순례기에서 극찬을 한—했다고 하는—곳이다. 사방이 밀밭으로 둘러싸인 오랜 역사의 우동 가게. 역시나 평일 오후라 한적하고 여유롭다. 드넓은 밀밭을 지나 마을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지만 마주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상상 속에서 저 멀리 까마귀 떼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하늘은 점점 불투명하게 흐려지고, 내 눈앞의 풍경은 마치 고흐가 말년에 그렸던 그림처럼 바뀌고 있다. 하지만 우울하지는 않다. 오히려 평온하고 차분하다. 내가 본 죽음은 그와는 달리 평화롭고 고요한 이미지로 그려질 것이다.
쯔유에 적셔 먹는 붓카케 우동은 어떻게 보면 평범하고 아는 맛이었지만, 오늘 하루의 여유로운 분위기에 적셔져 입속 가득 행복함을 남겼다.
한국 차라면 조금 더 현대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이었을 텐데, 소박하고 어찌 보면 투박하기까지 한 디자인이 이지적이고 매력 있었다.
어딘가 즉흥적으로 간 곳은 그에 걸맞게 조금은 흐릿한 이미지로 남겨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 천천히 산책하듯이, 눈이 가는 대로, 발이 이끄는 대로,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만 둘러보고 나왔다. 어떤 곳인지 상세히 알아보지 않았고 지금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이대로 조금은 흐릿한 이미지로 남겨놓는다.
치치부가하마는 인스타그램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SNS가 으레 그렇듯 단편적인 이미지와 과장된 정보—일본의 우유니 사막이라든지 하는—로 포장된 곳일 수 있지만, ‘할 것 없고 심심한’ 이번 여행에서 어떤 곳이든 어떠랴, 이번에는 어디든 좋다, 하는 마음가짐으로 큰 기대 없이 들렀다. 결과적으로 해가 떨어지는 너무 알맞은 순간에 도착해 노을 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함께한 좋은 추억과 기억에 남을 사진을 남기고 돌아왔다. 욕심을 비우는 만큼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말은 또 그만큼 욕심을 더 갖게 만드는 말이 될 수 있겠지만, 어찌 됐건 오늘은 비워낸 하루였고 그로 인해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한 시간가량 운전해 숙소로 돌아온 후 간단히 짐을 챙겨 붓쇼잔 온천으로 향했다. 숙소에도 온천—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목욕탕이라고 불러야 맞을 것 같은—이 있어서 매일 저녁 30분씩 몸을 녹였지만, 따로 또 시간을 내어 온천에 간 것은 우리에게도 좋은 선택이었다. 붓쇼잔 온천은 크지는 않지만 필요한 것들은 빠뜨리지 않고 모두 갖춘 운치 있는 곳이었다.
숙소 근처 우동 가게에서 카레 우동과 어묵 튀김, 치쿠와 텐을 시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카레 우동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메뉴지만 이 집의 갓 튀긴 어묵 튀김이 너무 맛있어서 이것만이라도 몇 개 포장해와서 먹고 싶다—선미와 그런 얘기를 떠나는 날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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