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주려 하늘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무더웠던 날씨는 언제 그랬냐듯이 선선해지고 우리가 그렇게 고대하던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좋아진 날씨 탓에 나들이가 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휠체어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이 가져다준 선선함을 느끼는 것이 전부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이유는 최근에 무릎 수술을 했기 때문이다. 수술이 끝난 직후 마취가 풀리면서 이것이 진정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인가 하는 의아함이 들었다. 무릎으로 유명한 커뮤니티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출산보다 무릎수술이 더 아프고 힘들었다.' 저 글이 공감이 되듯 나 또한 7년 전에 동일한 수술을 했음에도 이 통증에 대해서는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수술 후 3일이 지난 시점부터 통증의 강도는 완만해졌고 이렇게 밖에 나와 바람을 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갑갑한 병실 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에 만족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액 주머니와 영양제를 주렁주렁 매단 체 휠체어를 끌고 다녔는데 최근에 회복이 좋아져서인지 수액 주머니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몸을 움직이는 데 있어서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휠체어에서 벗어나 목발을 짚으며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목발이 익숙해질 때 즘 얼른 걷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했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는 머리를 감았다. 아직 머리를 감는 것이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보니 간병인의 도움으로 머리를 감을 수 있었다. 기름졌던 머리카락과 간지러웠던 두피가 조금은 치료받은 것 같다. 옷을 젖은 김에 환자복도 새것으로 갈아입었다. 그동안 찌들었던 땀자국과 옷에 묻어있던 수술의 흔적들을 말끔하게 갈아치웠다. 이렇게 사소한 것을 한 것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요즘 일상은 아침에 일어나 재활운동을 하고 오후에 물리치료를 받는 따분한 일상이다. 그 일상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목발을 짚고 밖으로 나가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들을 엿보는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고개 들어보니 '맑음'이라는 단어와 가장 어울리는 하늘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7년 전 무릎을 다쳤을 때도 똑같은 병원에서 수술을 했었다. 그때 봤던 몇 명의 직원들은 그대로 남아 아직까지 일을 하고 계셨다. 7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속에서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여전한 것들도 있다고 느껴졌다. 과거에 수술했을 당시 지금와 달리 내 옆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당시 교제 중이던 사람은 직장과 집이 병원과 멀어도 힘든 발걸음을 뒤로 한채 나를 보러 와줬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한 번씩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양손에 두둑이 챙겨 본인이 없을 시간 동안 먹을 일용한 양식들도 놔두고 갔었다. 어느 날은 나에게 냄새가 난다면서 머리도 감겨고 주고 세수도 해주었다. 그러다 수염이 덕지덕지 자란 날에는 예리한 면도칼을 들며 웃으면서 어설프게 면도도 해주었다. 또 일에 지쳤는지 전날 밤늦게 잤는지 나의 침대를 뺏어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 적도 있었으며 나는 그 모습을 휠체어에 앉아 한참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혼은 하게 된다면 그녀와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히 자리 잡았었다. 시간이 지나 그녀 덕분에 회복이 빨랐는지 목발 없이 걷기 시작했었다. 물론 쩔뚝거리기는 했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무렵, 그녀와 헤어졌다. 우리가 헤어지던 날,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분위기, 아직도 잊히지 않는 흔들리던 그녀의 두 눈동자. 그녀는 나에게 이별을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직감했었다. 그렇게 내가 걸을 수 있을 때 내 옆을 지켜주던 그녀는 나에게서부터 떠나갔었다.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왜 그때 그녀가 나에게 이별을 고했는지. 내가 바라봤던 그때의 흔들리던 눈동자는 진심이었을까. 흔들리던 것이 눈동자가 아니라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처럼 떨리는 설렘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럼에도 시간이 가져다준 선물 덕분인지 그녀에 대한 기억이 미화되어 좋았던 추억만 남겨졌다.
시월의 날씨는 꾀나 근사했다. 바닥을 적실만큼의 비와 적당히 불어는 바람과 따사로운 햇볕아래 어울려져 단풍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완벽한 순간들은 나를 물들였고 그 완벽함 속에서 여전히 나는 불완전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