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by 구기리

괜찮은 척했다.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도. 언제까지 이렇게 괜찮은 척을 해야 할까.


어린 시절, 나에게는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속사정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무의식 속으로 자리를 잡았다. 가끔씩 툭 튀어나와 내 행동에 제약을 주곤 했다. 가령 돈이 없었던 유년 시절의 경험은 성인이 되어서도 돈이 있으면서도 돈 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게 만들었다. 항상 필요한 지출인가를 먼저 생각했고, 그 결과 짠돌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누구나 저마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가지고 산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가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꺼내어 보자면, 나는 참 유년 시절에 불행을 곁에 두며 살았다. 그 흔한 군것질조차 못 해봤다. 하교길에 집까지 걷기 싫은 날이면 버스비는 없었지만 대담한 용기로 버스 기사의 눈을 피해 몰래 무임승차를 하기도 했다.


그런 유년의 기억들은 나에게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을 알려주었다. 비참하지만 삶에 대해 수긍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반면, 나는 삶을 수긍하기로 한 것이었다.

대학 시절, 알바를 하며 모은 돈으로 유럽여행을 떠났다. 처음 가보는 해외여행이라 모든 것이 설렜고, 지금까지도 소중한 추억이다. 나이가 들었어도 그때의 여행이 기억나는 것은, 거기서 삶에 대한 자세를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유년 시절 가난을 몸소 체험했기에 돈의 중요성을 알았고, 못 해본 것들이 많았기에 훗날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면 내가 희생하더라도 자식과 가족에게만큼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당시 내가 가진 가치관이었는데, 유럽여행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여행 가이드는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가족에게 헌신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 가족이 아닌 본인을 위한 삶도 함께 실현해 나가는, 그런 주체적인 삶이 더 낫지 않겠냐고.


그때의 기억을 바탕 삼아 나는 주체적으로 살아가려 노력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부모님이 그랬듯, 자신이 생각한 이상향과 삶은 항상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을. 누구나 자식에게 좋은 것만 해주고 싶고, 자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현실을 직면하면 어느새 예상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때론 내 감정에 대해 솔직하고 싶었다. 때론 삶을 역행하듯 살고 싶었지만, 이미 나이에 비해 성숙했기에 그러지 못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이것은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극히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이런 것이 나이 먹어간다는 것이라면 한편으로 슬프다. 아직 못 해본 것도 많고, 부모님께 못 해드린 것도 많기 때문이다. 나의 삶이 찬란하게 빛났던 것은 부모님이 항상 우리 앞길에 빛을 비춰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빛이 닿지 않는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나이가 그것을 대변해준다.

이제 우리도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힘들다. 때론 나도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이미 나이를 많이 먹었다. 이제야 안다.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감정을 통제하려 애써도 결국은 참아내야 한다는 것을. 마음이 원치 않는 것들을 직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부정하고 싶지 않다. 나도 누군가의 자식이자 부모이자 어른이고 아이이기 때문에. 이제야 안다. 나이가 들어가며 알게 된, 말할 수 없는 압박에 대해서. 이것은 우리가 나이 들어가며, 아니 우리 부모님이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짊어진 삶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다. 아니, 이것은 우리 부모님이 짊어졌던 삶의 이야기 중 하나다.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될까 봐 솔직히 무섭다. 그럼에도 살아가고 있다. 우리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런 삶을 살지 않으려 나이에 비해 성숙했지만, 그것은 그저 성숙이라 말하기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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