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했던 집에 도둑이 들었다.
온 집안은 엉망이 되었고, 군데군데 낯선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는 나의 마음의 집을 헤집어놓고 갔다.
나는 여기저기 둘러본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는 낯선 도둑이 아닌 내게 익숙한 면식범이었다.
그는 가랑비가 스며들 듯, 조금씩 나에게 스며들어 마음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흔적을 남겼다. 그 발자국은 사랑의 흔적이기도 하고 이별의 상처이기도 했다.
대문을 향해 찍힌 그의 발자국을 바라보며 괜찮다고 믿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고, 나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으니, 아무 일도 아닐 거라고 애써 믿었다. 걸레를 들고 박박 문질러 발자국을 지우려 했지만 흔적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도둑이 다시 들지 않게 방범장치도 새로 설치했다. 칫솔은 버리고, 손때 묻은 컵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가 좋아했던 노래는 플레이리스트에서 지워버렸다.
집을 정리하고 문을 잠가도,
언제 다시 도둑이 들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예고 없이 기억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조용히 갉아먹고 있었다.
그 순간을 늘 경계하다 보니 원치 않는 불침번을 서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밤이면 잠을 이루기 어려웠고 가까스로 잠들어도 새벽이면 몇 번이고 깨어났다.
그럴 때면 따뜻한 우유를 마시며 괜찮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며 겨우 잠이 들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정말 괜찮은 순간이 찾아왔다.
도둑이 들었던 기억조차 희미해졌고 그가 내 마음을 어지럽힌 적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 범인은 다시 집을 찾아와 또 한 번 헤집어놓고 갔다.
그가 떠났어도 그의 온기와 흔적은 여전히 집에 남아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닦아냈다고 믿었던 바닥에는 희미한 260mm 발자국이 남아있었고,
함께 읽었던 책 '모비딕' 사이에서 먼지 쌓인 편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의 손길이 스쳤던 모든 것들이, 한때 따뜻했던 기억들이, 이제는 상처가 되어 찔레꽃 가시처럼 나를 찔렀다.
나는 이제 안다.
흔적을 억지로 지우려 할수록, 더 깊이 각인된다는 것을.
외면했던 마음은 반드시 복수하듯 디스크처럼 툭 튀어나온다는 것을.
그러니 이제는, 아플 때 충분히 아파하자.
소리 내어 울기도 하고, 욕도 하고,
술에 취해보기도 하면서 마음껏 아파하자.
그렇게 아픔을 온전히 받아들이면,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도둑이 남긴 흔적이 더 이상 나를 짓누르지 않는다는 것을.
눈물 없이 그 시간을 떠올릴 수 있는 날이 오면 알게 될 것이다.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괜찮아졌다는 것을.
쾌청한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봄날, 나는 집을 다시 정리했다.
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머그잔도 사고, 플레이리스트는 내가 좋아하는 ed sheeran의 노래로 가득 채웠다. 먼지를 털어 낸 책장에는 어제 주문한 책이 꽂힐 것이다.
이제 나는 안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지만, 새로운 것들이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도둑이 남긴 흔적은 더 이상 나를 짓누르지 않는다.
이제, 나는 정말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