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트는 새벽하늘을 감상하는 건 카미노가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빨갛게 떠오르는 태양은 어두운 터널 속을 걷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으며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경이로운 새벽하늘을 감상하며 천천히 길을 걷고 있는데 장까를로가 나를 스쳐 지나간다.
"아란, 부에노스 띠아스(좋은 아침)."
"장까를로 아저씨,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
"아주 좋아. 저녁에 파스타를 만들어줄게. 나헤라에서 보자."
전날 지나가면서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장까를로와 로쵸. 무뚝뚝한 줄 알았는데 세심한 면도 있었다. 그런데 '나헤라(Najera)까지 가려면 30km, 적어도 7시간을 넘게 걸어야 한다. 컨디션은 전날보다 확실히 나아졌지만 영 자신이 없었다.
"아저씨, 전 발등도 붓고 걸음이 느려 오늘 나헤라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니 저는 못 갈 거예요. "
장까를로는 잠시 서서 골똘히 생각하더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운을 뗐다.
"음.. 나헤라에서 다시 보면 좋겠지만 무리하지는 마. 그리고 혹시 모를까 봐 하는 말인데 넌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강한 사람들 중 한 명이야. 지레 겁먹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길이 됐든, 인생이 됐든."
무심하게 툭 던진 한마디가 가슴에 박혀 큰 위로가 되었다. 고맙다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그는 빠른 걸음으로 점이 되어 사라졌다. 그의 말과 지난날의 선택들을 곱씹으며 나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하고 싶은 꿈이 생기면 '잘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으로 시작을 하거나 지레 겁먹고 뒷걸음칠을 치는 편이었다. 고등학생 때 파티시에가 되고 싶었지만 고가의 학원을 다니고 프랑스로 유학까지 다녀온 친구와 생활보호대상자로 수업료와 육성회비를 지원받았던 나를 비교하며 포기했다. 스포츠에 관심이 있었던 스무 살. 지방에 있는 스포츠경영과를 가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조건을 따져 경기도에 있는 전문대 경영과에 입학했다. 담임교수님과 상담을 했는데 교수님 지인도 스포츠마케팅을 하려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호텔에서 근무한다고 하셨다. '돈도 많이 들고 좁고 어려운 길이구나.' 생각하며 포기했다.
'남들이 못했으니 당연히 나도 할 수 없을 거야.' 가슴 설레는 일을 꿈꾸는 것은 나에게는 환영받지 못한 일처럼 느껴졌고 현실과 타협하고 체념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 같았다. 대학 졸업 후 홈쇼핑 사무직으로 취업을 했지만 상사와의 트러블로 9개월 정도 다니고 당일퇴사를 한 적도 있다. 상사에 대한 미움보다 '유종의미'를 거두지 못한 나 자신이 상당히 원망스러웠다. 이런 일들이 먼지처럼 하나, 둘 켜켜이 쌓이다 보니 자신감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점점 쪼그라들었던 건 아니었을까?
몇 시간 정도 걸었을까? 산티아고 3대 유명인사 중 한 명인 '마르셀리노 로바토'를 만나게 되었다, 탱글한 컬이 매력적인 백발에 턱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반지의 제왕 간달프를 닮았고,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비주얼 덕분에 스페인에서 가장 많이 사진이 찍힌 순례자가 되었다.
1970년대에는 카미노데산티아고 순례길이 오늘날처럼 보편화되지 않았었다. 노란색 화살표나 가리비껍데기조차 없었던 시절. 그는 1971년에 첫 카미노를 시작으로 중세시대 스페인 전통 의상을 입고 조롱박을 차고, 지팡이를 든 차림으로 도보순례를 했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를 거쳐 130,000km가 넘는 거리를 걸었고 1999년에는 당나귀와 개를 데리고 터키, 그리스 순례까지 다녀온 그의 인생은 순례 그 자체였다.
'카미노는 마약과 같다. 들어가는 사람은 나갈 수가 없다. 여행해야 하는 동기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약이다.(마르셀리노 로바토)' 그가 길에서 생명을 주는 약을 받은 것처럼, 이제는 그가 오두막을 방문한 순례자들에게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휴식처와 비스킷, 과일 등의 간식을 제공해 주시며 생명의 약을 선물하고 있었다.
그를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휘이익~"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두리번두리번거리니 2층 창문에서 한 아주머니께서 온화한 표정을 하시고 순례자들을 부르고 계셨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 위에 있는 평범한 가정집이었는데 이 집에 거주하셨던 '마리아' 아주머니는 순례자들이 지나가면 창문을 열고 빵과 과자를 던져주셨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돌아가시고 따님께서 바통을 이어받아 순례자들에게 과자보다 달콤한 사랑과 정을 나눠주고 계셨다. 운이 좋아 나도 아주머니께서 던져주신 빵과 비스킷을 받아 다른 순례자들과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이런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받은 만큼 사랑과 호의를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베풀 수 있을까?' 길에서 받은 따스한 마음을 받아 걷다 보니 약속된 장소인 '나헤라'에 도착했다.
나헤라 알베르게는 기부제로 운영이 되었다. 자원봉사자분들은 무더위에 지쳤을 순례자들을 위하여 수박과 과자를 나누어주고 계셨다. 수박을 한입 베어 물고 잠시 앉아 쉬는데 장까를로가 내게 말을 건넸다.
"역시! 여기까지 올 줄 알았어.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이제 내려놓고 자신감을 가져."
"아저씨 말처럼 전 생각보다 강하더라고요." 배시시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짐을 풀고 씻고 거실로 나오니 공용주방에서 로쵸와 장까를로가 메인 셰프가 되어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다. 도와줄 일이 없다고 주방에서 등떠밀려 나온 나는 새로운 순례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부모님과 함께 걷는 미국 청년, 딸과 함께 걷는 아일랜드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다. 저녁이 준비될 시간동안 사람들의 발이 괜찮은지 선한 오지랖을 피우고 다녔다.
"밥 먹어." 15분 정도 흐른 후 저녁식사가 다 되었다며 장까를로가 사람들을 불렀다. 거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식탁에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브라질 등 다양한 국적의 순례자분들과 옹기종기 둘 러앉았다. 커다란 냄비 2개에는 '까르보나라파스타'가 가득 들어있었고 파스타와 함께 토마토 샐러드, 레드와인이 우리의 저녁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오늘의 식사기도는 스윗한 호세 아저씨가 맡았다.
장까를로와 로쵸가 만들어준 파스타는 계란노른자, 베이컨, 양파를 섞어 만든 까르보나라파스타였는데 25년간 먹어본 까르보나라파스타를 다 부정할 정도로 맛있었다. 화려한 산해진미도 아니고 고급레스토랑 코스요리도 아니었지만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다국적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함께 했던 저녁식사는 세상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을만큼 가슴 벅차도록 행복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