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프리미엄 와인 생산지 '리오하주'의 포도내음이 가득한 포도밭을 것는 것으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발등 붓기는 여전했지만 무릎에 힘도 잘 들어가고 컨디션이 좋다. 체력이 좋아진 것도 있지만 전날 함께 저녁을 먹었던 다국적 순례자들과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는 기쁨이 한 몫한 것 같다. 순례자 이상 가족같은 분들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다. 포도밭의 싱그러움을 지나 반짝이는 황금을 닮은 드넓은 밀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늘한 점 없는 길이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작열하는 태양 대신 옅게 드리워진 구름이 낮게 깔린 덕분에 지치지 않고 걸을 수가 있었다.
장까를로, 로쵸, 기, 마리, 글로리아는 앞으로 걸어가고 나는 그 뒤를 따라 선생님과 함께 님께 한가지 무모한 제안을 했다.
"선생님, 오늘 저녁은 저희가 한국 음식을 저분들께 대접하는 건 어떨까요? 제가 비록 요리는 잘 하지는 못하지만 다들 한국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을 것 같아 맛보여드리고 싶어요. "
타국에서 한국 요리를 한다는 건 쉬운일은 아니었다. 인구가 7만명이 넘는 아일랜드 골웨이에도 한인마트가 없어 수도 더블린 한인마트에서 고추장, 간장 등의 재료를 공수 했었다. 인구가 7천명도 되지 않는 작은 소도시 '산토도밍고' 에서 한국 음식을 만든다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까울 수 있었지만 선생님은 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주셨다.
'어떤 선물이 좋을까?' 소중한 사람을 위한 선물을 고민하는 사람처럼 '어떤 음식을 좋아하실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설렘 가득한 마음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알베르게까지 도착했다.
'꾹' 크레덴시알에 도장을 받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크레덴시알의 하얀색 여백이 알베르게의 도장으로 채워질때마다 왠지 모를 성취감과 뿌듯함이 밀려온다. 오늘 하루를 잘 마쳤다는 안도감과 함께 묵묵히 걸어온 내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오늘은 코리안 디너타임에요.선생님과 제가 한국 음식을 만들어드릴게요."
사람들은 환호했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선생님과 마트로 갔다. 우리는 가장 무난하고 호불호없는 불고기와 볶음밥을 만들기로 했다. 우리를 포함한 사람들은 총 16명. 16인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었다.
양손 가득 장을 보고 알베르게가 들어왔다. 선생님은 간장 대신 피시소스로 불고기를, 나는 볶음밥을 준비하기로 했다. 냄비에 밥을 올려놓고 야채를 다듬고 있는데 마리와 기가 주방으로 와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을 건넸다.
"아한, 뭐 도와줄까?" 마리와 기는 날 항상 아란이 아닌 '아한' 이라고 부른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도 잘해요." 라고 말했지만 기는 이미 내 앞에 있는 도마의 방향을 돌려놓고 당근을 썰었다. 기는 은퇴한 경찰이었는데 마리를 알뜰살뜰 챙길 뿐 아니라 나를 딸처럼 굉장히 예뻐해주셨다. 그의 얼굴에는 '내 딸내미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겠어.'라는 굳은 의지가 나타나 있었다.기가 야채를 다듬는 사이 볶음밥에 올릴 계란 후라이를 만들려고 했지만주걱을 실바에게 또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게 프랑스 친구들에게 밀려 주방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프랑스 사람들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것인데 산티아고에서 내가 만난 프랑스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사려깊었다.
밥이 완성되고 다시 프라이팬에 감자와 당근을 넣고 함께 볶음밥을 만들었다. 한국과 프랑스의 합작품이 되어버린 볶음밥과 단짠단짠 불고기. 맛있는 냄새가 주방에 솔솔 퍼지고 피리부는 사나이가 되어 사람들이 하나 둘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커다란 식탁에 16명의 사람들 둘러 앉았다. 스페인, 프랑스, 브라질, 한국, 이탈리아 다국적의 대가족이 한 테이블에 모여 한국음식을 즐긴다니 상상만으로도 행복한데 상상했던 일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스페인 출신 로맨티스트 호세가 식전기도를 해주었다. 식전기도를 마치고 사람들이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모두들 맛있게 드셔서 다행이었다.
선생님과 나는 '숭늉'을 디저트로 준비했다. 밥을 어느정도 배부르게 먹고 냄비에 물을 넣고 끓여 숭늉을 만들어 한잔씩 컵에 따라 드렸다. 장까를로는 비주얼을 보더니 질색팔색하며 안먹는다고 난리를 피웠다.
"아저씨, 코리안 라이스 티에요. 진짜 눈 딱 감고 한번만 드셔보세요."
장까를로는 미간에 삼지창이 생기도록 인상을 찌푸리며 못이기는 척 한모금 마셨다. 숭늉이 입을 지나 식도를 넘어가는 순간 그의 표정은 180도 달라져있었다.
"아란, 나 이거 한잔만 더 줄 수 있어" 김치 안먹는다는 미운일곱살 떼쟁이 아이처럼 질색팔색 하던 그의 모습은 어디가고 사자 앞에 온순한 양이 된 모습이었다. 살짝 얄밉긴 했지만 한잔을 더 따라주었다.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거와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큼 뿌듯한게 없다.' 라는 옛말이 있는데 순례자 가족분들이 맛있게 드시는 걸 보면서 그 기분을 조금이나마 알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