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지는
그래서 앞으로의 인생이 술술 풀릴 것 같은
'기분 좋은 날' 말이다.
별다른 이유 없이 정한 오늘의 산책코스
경춘선 숲길은
날씨도, 장소도, 사람도 그야말로 완벽했다.
만추에 흩어지는 플라타너스 낙엽들 속에서
동화처럼 쭉 뻗은 녹슨 기찻길 위를
오롯이 우리만 걸었다.
서울이란 도시는 정말 넓다.
30년 넘게 살았지만
아직도 처음 와보는 곳이 이렇게 많으니 말이다.
옛 영화가 가득한 육군사관학교 바로 옆 폐역인
화랑대역에서 출발해
인근 서울여대, 태릉선수촌을 지나 삼육대 근처까지
계절을 음미하며 왕복 10킬로 정도를 걸었다.
<건축학개론>에서 수지가 기찻길 걷던 장면이 떠올라
짱이를 둘러맨 아내에게 포즈를 취하라 했더니
신나서 비틀거리며 걷는다.
(찾아보니 그 장면은 양평 구둔역이란다)
어젯밤 들은 아내의 옛날 얘기가 생각난다.
18살에 상경한 순진한 이 시골소녀는
육사 근처 동구릉에서 일 년 간 친척집에 잠시 살았단다.
사촌오빠 3명으로부터 이쁨을 듬뿍 받았는데
혹시라도 누가 업어갈까 봐 매일 하굣길에 교대로 마중을 나와 줄 정도였다고...
그렇게 낯선 서울생활을 시작했고
어려운 집안 장녀로 힘든 청춘을 힘든 줄 모르고 보냈는데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참 많았다고...
언젠가 자기 얘기를 글로 쓰면
대박 날 거라고
아마도 제2의 빨간 머리 앤이 될 거라고...
술 마실 때 조금씩 들려주던 레퍼토리였지만
마지막 한마디가 남는다.
이쁨을 듬뿍 받은 기억을 가진 사람은
절대 삐뚤어지지 않는대
계속 잘하란 위협인가... 했는데
지금 앞에서
기찻길을 비틀거리며 깔깔대며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18세 순진했던 그 시골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살면서
얼마나 이쁨을 주었을까?
아니, 받은 거만큼은 주긴 했을까?
오늘은 참 모든 게 이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