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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Dec 08. 2021

겁쟁이에서 사내로

한번 더 뛰자

난 울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구연동화 대회에 나갈 반 대표로 뽑혔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동화를 외우고 손짓, 몸짓, 목소리 톤 변화까지 연습하며

대회를 하루하루 기다리던 어느 날,

수업 시간에 갑자기 담임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시더니

앞으로 나와 구연을 미리 한번 해보라 하셨다.


순간, 몸은 뻣뻣하게 굳었고

그동안 외우고 연습했던 것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게 집중된 반 친구들 시선을 마주 대할 수도 없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우는 것뿐이었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을 쳐다보자 상황은 끝났다.

 

그리고 새로 오신 교생 선생님과 개인교습까지 하며

무대 공포증을 이겨보려 했지만

번번이 울음이 나와 결국 다른 반 친구가 대회에 나갔다.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난

내 이름이 불릴 때마다 가슴이 뛰는 겁쟁이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체육대회 높이뛰기 경기에 나갈 반 대표로 뽑혔다.


키가 제일 컸다는 이유였는데

(이휘재의 롱다리 유행 전까진 그리 좋은 게 아니었다)

운이 좋아 결승전까지 가게 되었다.

상대는 학교 육상부라서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뛰었는데

다리가 살짝 걸려 봉이 흔들렸지만 무사히 넘었다.

예상대로 상대는 깔끔하게 넘어버렸다.


심판을 보시던 선생님이

진행 시간도 촉박하니 불안하게 넘은 내가 2위라 하자셨다.

'그래... 이만하면 됐어'하고 있는데

저쪽에 우리 반 친구들이 날 응원하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한 번만 더 뛸게요


당황한 선생님과 상대의 얼굴이 보였고,

내 이름을 외치는 친구들 응원이 들린 것 빼고

어떻게 다시 뛰었는지 솔직히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이번에 나는 깔끔하게 넘었고

상대는 봉에 걸려 실패했다는 그 결과만 기억난다.


지금 돌아보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이름이 불리는 게 더 이상 창피하지 않게 된 것이.

겁쟁이였던 내가 사내라 느껴진 것이.





나훈아 형님의 <사내>란 노랠 듣다가

떠오른 나의 이야기였다.


긴가민가 하면서
조마조마 하면서
설마설마 하면서
부대끼며 살아온

이 세상을 믿었다
나는 나를 믿었다
추억 묻은 친구야
물론 너도 믿었다


나이가 들면 남자는 다시 겁쟁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운다고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한번 더 뛸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미련도 후회도 없이

사내답게 살다 사내답게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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