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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Apr 20. 2021

문화적 취향의 편견을 깨다

<나빌레라>

나도 발레에 빠졌다

요즘 유일하게 정주행으로 챙겨 보는 <나빌레라>.

처음에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70대 남자 노인이 발레를 배운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뻔히 예상되는 스토리라서 재미있다는 아내 말에도 뚱했는데, 지난 주말 막상 한편을 보고 나서 이 드라마에 금방 빠져들고 말았다.


웹툰이 원작이라 그런지 전개가 빠르고 뻔하지 않기도 했지만, 내 눈을 고정시킨 건 발레였다.


내 또래 중년 남자들 대부분 그럴 테지만, 나 역시 발레 하면 왠지 하늘하늘하게 마른 여자가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딱 붙는 옷을 입고 발 끝을 세우며 사뿐사뿐 걷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뭔가 유럽의 귀족 같은 상류층들이 주로 즐기는 고상하고 따분한 장르의 예술이라는 인식이 강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발레 선생으로 나오는 '송강'이 할아버지 '박인환'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눈 오는 공원에서 춤추는 장면은 그런 나의 편견을 단번에 깨버렸다. 그리고 검색을 통해 발레에 대해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Ballet'란 불어 발음과 달리 프랑스가 아닌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고, 당시는 남성 무용수 '발레리노'만 있었다는 거. 여성 무용수인 '발레리나'가 등장한 건 한참 뒤인 17세기부터이며 발 끝으로 서는 기술인 '푸앵트'는 19세기 '마리 탈리오니'에 의해 처음 선보였다고 하는데, 공연 기획자였던 그녀의 아버지가 포인트 슈즈를 신겨 <라 실피드>에 출연시켜 대박이 났다는 거 등등


그리고 연관 검색을 따라가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쓴 <구별 짓기> 책에 나오는 "문화적 취향은 사회적 계급이다"라는 구절도 내 시선을 끌었다. 발레가 16세기 프랑스로 시집 온 이탈리아 공주에 의해 전해져 '루이 14세'에 의해 당시 귀족사회의 필수 교양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다 보니 태생적으로 소수만 누릴 수 있는 고급문화로 인식되는 것 또한 이해가 되었다.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또 하나 재미있는 건 드라마 제목이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승무>에서 왔다는 점이다.


이 시는 내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려 당시 대입 수험생이라면 한 글자 한 글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웠던 기억이 선명하다. 사실 지금도 떠듬떠듬 생각날 정도니까. 하지만 그때는 정말 몰랐다. 승무란 춤의 한 동작 한 동작을 마치 발레처럼 이토록 섬세하고 우아하게 묘사한 것인 줄, 그리고 이 시를 쓸 당시 그 시인이 나와 같은 약관의 나이였다는 것인 줄.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중략)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인생은 짧고 예술은 참 기이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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