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낮잠의 추억

by 본드형

여름이 사부작거리는 5월의 마지막 월요일,


고달픈 직장인의 출근 행렬이 시작되는 서울을 벗어나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초보 백수의 기분은 아직 낯설지만 꽤 짜릿했다.


오늘은 아내와 경기도 이천으로 그릇을 사러 왔다.


임금님이 드셨다는 이천쌀로 지은 한정식으로 거하게 브런치를 먹고 근처에 있는 도자예술마을을 찾았는데, 오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한가롭기 그지없다.


마치 서부영화에서 본 무법자가 나타난 마을처럼, 세상이 모두 멈춘 것 같은 이 나른한 오후에 모두 낮잠이라도 자러 간 걸까?

그늘 밑에 차를 잠시 세우고 라디오를 켠 후, 선루프 너머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솔솔 졸음이 몰려오며 옛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80년대 초반, 그러니까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 여름이 되면 점심 먹고 1시간 정도 낮잠 자는 오수(午睡) 시간을 주었다.


식곤증으로 오후 수업 때 졸지 말라는 취지였겠지만, 한창 혈기 왕성하고 호기심 넘치던 십 대 남자애들이 바로 잠이 올 리가 있겠는가. 대부분 책상 위에 엎드리거나 교실 바닥에 누워 선생님 눈을 피해 만화책을 보는 등 딴짓하기 일쑤였다.


나는 손바닥 만한 라디오를 사서 이어폰 줄(당시 무선이어폰은 세상에 없었다)을 소매에 숨겨 귀에 꽂고 몰래 듣다 잠들곤 했는데, 오늘처럼 나른했던 그때 라디오로 들었던 DJ의 멘트와 노래들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스르르 낮잠이 들었을 때 꾸던 꿈은 늘 한결같았다.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나는 어느덧 희긋한 '어른이'가 되어 버렸는데, 한없이 느렸던 그때 꿈처럼 배부른 낮잠의 추억은 여전히 꿀처럼 ...




"우체국 앞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듯 흐뭇한 얼굴로 플라타너스 잎사귀 사이로 번뜩이는 햇빛에 한쪽 눈을 찡긋한다."


김화영 에세이

<프로방스의 아침 시장과 카바용 멜론의 향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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