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eation workshop이라는 새로운 세계
2009년이면 벌써 14년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첫 경험이 앞으로의 커리어를 결정할 정도로 내게는 신선했기에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운 좋게도 대학 졸업 직후 존슨앤존슨에 채용되었지만, '딱 내 일'이라는 느낌을 찾아 전략 컨설팅, 인사 컨설팅 펌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던 중에 스위스의 BrainStore가 한국에서 국내 금융사와 아이디어 도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이 프로젝트에 컨설턴트이자 BrainStore의 CEO인 Nadja Schnetzler의 통역사로 초대되었다. 그녀의 통역사 역할을 한 기회 덕분에 아이디어 도출의 전 과정을 바로 옆에서 관찰할 수 있었고, '내가 열정적으로, 또 잘할 수 있는 나의 일'을 찾는 결정적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BrainStore를 설립한 Nadja Schnetzler는 아이디어 도출 방법론인 IdeaMachine의 창시자였다. 그녀는 아이디어 도출 프로젝트를 어떻게 설계하고 진행하고 관리하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원칙들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는데, 그 원칙들이 프로젝트를 이끌어가고 IdeaMachine을 효과적으로 작동하는데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컨설턴트로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Nadja Schnetzler를 만나기 전, 전략 및 인사 컨설팅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에는 주로 데이터와 리서치로 결론을 도출해 왔지만, Nadja Schnetzler는 정량적 데이터보다 경험과 영감에 의존하여 유의미한 결론을 창출하였다. 이 신선함에 매료된 결과 IdeaMachine을 직접 운용해 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게 된 것이다.
목소리 크거나 직급이 높은 사람의 의견이 주로 관철되는 일반적인 브레인스토밍 회의와 다르게, 모든 참여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영감을 짧은 시간 안에 표출하게끔 유도하고, 그 의견들이 공유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아이디어로 승화되어 가시적인 결과물로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은 말 그대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기계 장치'처럼 체계적이고 압축적이고 효율적이었다.
이쯤에서 Nadja가 개발했고, 나의 첫 아이디어 도출 프로젝트에서도 적용되었던 아이디어머신이라는 방법론에 대해 설명해 보자면, 이 방법론은 크게 준비, 축적, 발견, 실행의 4단계로 이루어진다.
준비 단계는 말 그대로 프로젝트를 계획하는 단계로, 컨설턴트들은 기업에서 아이디어 도출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고 있는 팀을 인터뷰하여 그들이 원하는 프로젝트의 목표와 실행할 아이디어를 선택하는 기준을 명확히 정의한다. 처음 프로젝트를 의뢰할 때 제시했던 목표는 인터뷰 과정에서 변형될 수 있고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니즈가 새롭게 제기되는 경우는 다반사다. 이렇게 가변적인 목표를 정리하여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쉽고 명확한 언어로 목표를 정제하는 것이 어렵고도 중요한 과업인 것이다. 두 번째 축적 단계는 고객사 내부 직원뿐 아니라 외부 고객, 경쟁사의 고객 등의 관련자를 한 공간에 초청해 서로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에 연루시켜 그들의 개별적인 경험을 가시적인 영감으로 도출한다. 축적 단계에서 제시된 수천 개의 영감들은 발견 단계를 거치며 실행 가능한 아이디어로 발전된다. 축적 단계가 아이디어의 무제한적인 양적 확보를 목표로 추구한다면 발견 단계는 그 양에 의존하여 아이디어의 질적 수준을 최대치로 제고하는 단계인 것이다. 축적 단계에서는 영감을 도출하기 위해 참여자들의 활발한 교감을 장려하는 반면에, 발견 단계에서는 축적 단계에서 도출된 영감들을 참여자가 정적인 시공간에서 정제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렇게 획득한 수백 개의 아이디어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거쳐 수십 개의 구체적인 아이디어로 재탄생된다. 마지막 실행 단계는 이 아이디어들을 시각화하여 프로젝트 주관 팀과 의사결정권자에게 제시하고 그들은 최종 아이디어를 선택한다. 선택된 아이디어를 언제 어떻게 누가 실행할 것인지에 관한 로드맵을 완성하는 것과 동시에 프로젝트도 마무리된다.
이 아이디어머신을 실제로 적용했던 사례는 국내 금융사의 대출상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프로젝트였다. 준비 단계에서 기업의 담당 팀을 인터뷰하여 이 프로젝트의 목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고객사 자체적으로 정의하지 못한 숨은 목표나 기대치를 함께 정의했다. 그 목표와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아이디어를 도출하는데 필수인 워크샵 프로그램과 워크샵 도중 참여자들에게 제시되어야 하는 질문들, 그 질문에 대한 응답방식들을 설계하는 것도 이 단계에서 해야 할 일들이다. 뿐만 아니라 계획된 인원수로 워크샵을 진행하기에 적절한 면적과 뻔하거나 딱딱하지 않은 분위기를 가진 장소를 섭외하고, 합목적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는데 적합한 참여자들을 선정했다.
마침내 청담동의 한 전시공간에서 드디어 워크샵 당일, 케이터링 음식들(아이디어 도출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을 세팅하고 모두 함께 모일 공간, 팀별로 앉아 이야기할 공간, 각자 노트북으로 작업할 공간 등을 배치했다. 참석자들은 미술관과 같은 느낌으로 꾸며진 공간으로 인도되었다. 다양한 음식들과 의자가 곳곳에 세팅되어 있는 공간에 이국적인 음악이 어우러져 참여자들의 기대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에서 '오늘 뭔가 새로운 걸 경험하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엿볼 수 있었다. 첫인상은 참여자들이 주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영감과 아이디어를 도출하게 유도함과 동시에 기업의 고객들에게 브랜드 이미지를 개선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모두 둘러앉아 오늘 우리가 왜 모였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 함께 아이디어를 내는 시간의 가치에 대해 설명을 청취함으로써 동기부여는 정점에 달하게 된다. 충전된 에너지를 바탕으로 영감 도출 활동, CreativeTeam 활동을 시작한다. 영감 도출 활동은 짧은 질문들에 대해 5분 단위로 답변하는 세션이다. 5분마다 바뀌는 질문에 즉각적으로 답할 때 깊게 생각할 틈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야 머릿속에 떠다니는 피상적인 영감들을 추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뛰어다니면서 답하기, 빠르게 1대 1로 만나 답하기 등 정적으로 앉아 있기보다는 활동적인 방식으로 답변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후 점차적으로 3-4명씩 팀을 이루어 그림을 그리거나 클레이나 레고 등 평소 접하지 않았던 도구들을 활용하여 더 깊이 내재되어 있는 영감을 끄집어내는 활동으로 심화시켜 나간다. 이 축적 단계의 영감 도출 활동들은 신속하게 전환됨에 따라 모든 참여자들의 이동이 불가피하므로 참여자와 진행자의 동선을 사전에 고려할 필요가 있다.
발견 단계의 IdeaCity(아이디어 도출 시간)를 진행할 때에는 CreativeTeam(영감 도출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진행하더라도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CreativeTeam(영감 도출 시간) 때 도출한 수천 개의 영감들을 공간 곳곳에 분산시켜 놓는데, 이 날의 공간 컨셉은 해변가였기 때문에 미니풀장 안에 영감들을 뿌려놓기도 하고 곳곳에 배치된 비치베드 위에 영감들을 올려놓아 참여자들이 편안하게 아이디어들을 확인할 수 있도록 연출했다. 다양하게 연출된 공간에 개별적으로 머무르거나 공간을 이동하면서 아이디어를 문자로 구제화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때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참여자들을 방임해서는 안 되며 도중에 주제와 관련된 적절한 질문이나 아이디어에 영감이 될 수 있는 소스를 던져 주어야 한다. 재촉과 방임 사이의 적절한 선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인 것이다.
그렇게 계획된 워크샵이 끝나면 참석자들은 아이디어머신이라는 기계 위에서 착즙 된 듯한 탈진과 피곤을 느끼곤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생성해 낸 아이디어의 양에 압도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평상시 간헐적으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사람이 대부분일 텐데 아이디어만 떠올리는 행위만으로 하루를 채우는 경험은 이색적인 것이 분명하다. 아이디어 머신이 생산해 내는 많은 영감과 아이디어, 양질의 아이디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몰입에 기인하는 것이다.
워크샵 종료 후에 컨설턴트가 해야 할 일은 더 많다. 워크샵의 결과물인 수백 개의 아이디어를 각각의 핵심(Selling point, 혹은 아이디어 씨앗이라고도 한다.)을 살리는 선에서 합쳐야 하는 것은 합치고, 분리해야 하는 것은 분리하면서 정제하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완성된 아이디어들을 사전에 정했던 평가 기준과 함께 전문가들에게 선 보이고, 의견을 수렴하는 ThinkTank 워크샵도 진행해야 한다.
이때에도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은 중요하다. 일반 참여자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전문가'들은 부정적으로 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퍼실리테이터는 '그래서는 안 된다.'라는 메시지 대신, '그렇다면 이 아이디어의 씨앗을 살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더해지면 실행 가능한 아이디어가 될 수 있을까?'라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논의를 유도해야 한다.
이렇게 현실적이고 전문적인 관점이 더해진 아이디어를 컨설턴트는 재차 정제하고 시각화하여 고객사의 프로젝트 팀과 마지막 결정의 시간을 갖는다. 이 때는 컨설턴트가 '공장에서 갓 나온' 최종 아이디어들의 포인트를 살려는 방향으로 프레젠테이션 한다. 그렇게 결정된 각각의 '실행 아이디어'를 앞으로 어떤 팀에서 누가 언제 어떻게 실행할지 계획을 함께 수립하는 로드맵 워크샵까지 진행되면 프로젝트는 마무리된다.
2009년에 경험한 첫 워크샵부터 2019년, 코로나 직전까지 40-50개의 문제 해결 아이디어 도출 프로젝트를 아이디어머신 외에도 다양한 방법론으로 진행해 왔지만 (기업에 따라, 주제에 따라 프로젝트 및 워크샵 진행 기간, 투입인원, 아이디어 도출 툴들은 매번 세부적으로 달라지더라도) 큰 흐름은 앞에서 묘사한 것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첫 프로젝트에서 구체적인 방법론을 배운 것도 큰 수확이었지만 얼마나 체계적으로 워크샵의 규칙과 틀을 기획해야 하는지, 아이디어를 자극함에 있어 어떻게 완급을 조절해야 하는지, 머릿속에 모호하게 부유하는 니즈와 아이디어들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에 대한 디테일한 팁을 체득한 것은 더 큰 자산이 되었다. Nadja의 통역을 맡은 덕분에 바로 곁에서 그것들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컨설팅'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딱딱한 회의실에서 '있어 보이는' 정장을 입고 '격식을 갖춘' 말투와 '타당한' 자료들을 제시하는 것 대신, 아이디어 도출 워크샵에서 사람들의 뇌와 마음을 자극하여 영감과 아이디어를 최대한 솔직하고 자유롭게 표출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노하우도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색적이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최대한 '편안한' 복장으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화면, 음악, 질문, 활동들에 노출시키는 노하우는 다른 컨설팅 방법론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프로젝트를 설계하는 Ideation Consultant (아이디에이션 컨설턴트)이자 워크샵을 진행하는 Facilitator (퍼실리테이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디테일한 부분까지 미리 계산해서 계획하고 확인하는 치밀함이 필수적이다. 뿐만 아니라, 워크샵 참여자들이 어떻게 느끼고 행동할지 예상해서 활동들을 계획하고 그에 맞는 역할과 동기를 부여하고 자유롭게 생각하도록 지원하고 그들이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까지 컨선턴트가 해야 할 몫이다. 이 모든 역할들이 내 적성에 맞았기 때문에 일하는 동안 재미있었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느낄 수 있었다.
비로소 이 일을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다는 결심이 섰고, 그 후로 11년 동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기업이라면 어떤 분야든 프로젝트와 워크샵을 진행하였다. 앞으로 그 다양한 프로젝트와 방법론들에 대한 기록들을 여기에 남겨보려 한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이 세계와 내 경험들에 대해. 내가 경험한 도구들과 어떤 원리로 사람들을 움직이고 아이디어를 내게 할 수 있는지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