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망가지지 않았어
"약물 치료를 받아보는 건 어때요?"
자존감이 높지 않아서, 우울과 불안 증세가 심해서 여러 차례 상담을 권유받은 적은 있었지만. 약물치료를 권유받은 적은 없었다. 우울과 불안이 심해지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나는 내가 아직 괜찮다고 여기곤 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요즘 집안일을 자주 미뤘다. 짐정리도 바로 하지 않고. 빨래는 한구석에 몰아뒀다 자기 전에 다 개고. 설거지도 바로바로 하지 못하고 하루를 마치기 직전에 해냈다. 상담사분은 미루긴 하더라도 '해내고 잠드는' 나를 칭찬하셨지만. 그건 의미없다 떠올렸다. 서너 시까지 일을 미루다가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부랴부랴 집안일을 마치고. 졸린 눈 비비며 학교에 가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새벽에 그 밀린 집안일들을 마치고 잠자리에 누운 나는 스스로를 한심하다 여겼다. 어차피 해낼 일을 미루고, 잠마저 미루는 삶이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 잠에 드는 것마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뒤척이며 하는 생각이라곤 쓸모없는 생각뿐이었다. 그날은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나는 왜 이렇게 한심했지. 나를 갉아먹는 말들을 수십 차례 내뱉기를.
나는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가끔 호흡이 너무 빨라져 숨을 잘 쉴 수 없었고.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만 같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고. 나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내 상황이 두려워졌다.
그래도 일상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다 생각했다. 나는 과제나 일상생활에서 좋은 성취는 이루진 못했지만. 해내고 있음에 안도했다. 알바를 빠지지 않고 매일 내 몫을 해냈기에 내가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가끔 자책을 심하게 했으며, 숨을 못 쉬게 답답한 순간이 많을 뿐. 그것이 치명적인 문제라곤 여기진 못했다.
우울증과 불안, 공포 그리고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난 이것이 일상적이다라고 여겼다.
어느 날,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피로했던 그날. 나는 알람을 까먹고 맞추지 못했고. 난생처음으로 아르바이트 지각을 했다. 해당 상담에서 그 이야기를 말했고 상담사분은 내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셨다.
"이게 일상에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나요?"
당혹스러움, 두려움, 괴로움. 어떤 감정도 날 설명할 순 없었다. 이 정도 일은 우울증이 아니어도 겪을 수 있는 일 아닌가. 내가 아무리 우울증 증세가 높다고 해도. 이 정도 일은... 충분히.
상담을 종결하기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2회차면 끝날 상담. 나는 문제없다 생각해 끝나겠구나 생각했던 그날. 나는 두 가지 당부를 듣게 되었다.
'약물치료, 상담 연장'
상담사분의 개인사정으로 상담을 지속할 수 없었기에 나는 상담 인계를 겪었고. 약물치료에는 대답할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상담 연장은 불가피했다. 일상생활에 정말 문제가 없냐는 물음에 나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난 아직 망가지지 않았는데... 난 아직... 삶을 살아갈 여유정돈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망가진 나, 그리고 일상. 난 그 무엇도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