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코트를 걸치고
겨울이 싫었다, 보세옷 입으면 티 나는 계절이니까.
어른,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겨울의 계절감과 같았다. 시리게도 춥고, 눈발 내리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게. 여름 장맛비는 옷이 젖어감을 아는데 겨울의 눈송이는 무게감이 느껴지다 어느새 조금씩 옷을 적시고 마니까. 잠식되고 있음을 깨닫지도 못하는 그런 계절이라서. 겨울은 부단히 스스로를 껴안아야 했다. 오들오들 떨리는 팔과 다리를 안아야 했다. 얇은 이불 수십 겹을 올리고, 그 이불의 무게를 느끼면 그것이 가난의 무게인가 떠올리는 계절이었다. 값싼 외투는 무겁다, 그렇다고 따뜻하지도 않다. 눈송이들을 맞고 있을 때면 어느새 더 무거워 축 쳐지게 한다. 이것이 눈송이 탓인지, 나의 기분 탓인지 깨달을 방도는 없지만 겨울은 무거운 계절이었다.
눈발 날리는 풍경을 창으로 바라볼 때는 아름답다 떠올리기도 했다. 새하얗게 덮이는 풍경을 바라보자면 무결하다 떠올렸으니까. 어른의 삶도 어릴 때 바라보면 꽤나 멋있었잖아.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것이 얼마나 멋있던지. 그 실체를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지만. 어릴 때는 어른이 멋져 보였다고 떠올렸다.
아 이거 오늘까지네. 먹고 싶지 않아도 유통기한 임박한 음식을 먼저 먹어치운다. 살다 보니 엄마가 왜 그렇게도 오늘 이걸 먹어야 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돈 때문만이 아니라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건 어른의 일이 아니었다. 어린 아이나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였어. 혼자 담담하게 웃어냈다.
떨이상품, 그다지 좋아하는 음식도 아닌 그저 저렴한 음식. 그래도 오늘도 한 끼를 때웠구나 하는 안도감이 밥 먹였다. 두려웠던 거지, 어른이 된다는 건. 나를 책임지기가 겁났던 거야. 어릴 때, 무슨 꿈을 가졌던가.
터무니없는 꿈도 있었다. 어릴 때는 그저 하얗고 사랑을 담아 만드는 눈사람이 부러워 눈사람도 되고 싶었고. 중학교 때는 사람을 돕는 일이 좋아 그런 쪽으로 많이 생각도 했었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진작에 접었지만. 입시 때는 어땠었지, 아 괜히 생각했구나.
생각이 눈발처럼 날아다닌다. 가볍지만, 무겁게 옷을 적신다. 언제 젖었는지 모를 눈 속 코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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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니면 안 되겠어?"
"저는, 이 일이..."
"묻잖아. 이 일이 아니면 도저히 안 되겠냐고."
"그러니까... 저, 저는..."
그 어릴 땐 교무실 밖으로 나와서 눈물을 훔쳤다.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뜨거운 눈물은 턱을 타고 차게 식어서 심장도 얼어붙게 만들었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겨울이 오는가 싶던 그날, 그 말들. 눈물은 얼음이 되었나. 심장 아프게 차가운 그 날들.
싸구려 이불들을 다시금 감싸았는데 추워져서 괜히 몸을 떤다. 꿈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애매하게 삶을 살아갈 줄 알았다면 그때 소리쳐서 꿈을 얘기해 볼 것을 그랬다. 그때도 겨울이었는지 왜 그리 추웠는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눈발은 그치지 않고, 또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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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정말 후회 안 해?"
"후회 안 해, 난 자신 없어."
"그 일 좋아하잖아. 뭐가 자신이 없다는 거야?"
"난 못 해. 부모님도, 선생님도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까. 난 원래 비겁해."
비겁했던 그날도 지나, 다시 눈 발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들을 했다. 어릴 땐 왜 눈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자신도 없는데 싸구려 코트를 걸치고 밖을 나갔다. 많이 추울 텐데, 장갑조차 없는데.
아이들이 이미 삼삼오오 모여 눈사람 만들기에 열중이다. 부끄럼을 감추고 멀리서 눈사람을 만들어본다. 조금 굴리다 못해 눈이 생각보다 부족하구나 싶어서 또 주저하고 만다. 괜히 나왔다. 손이 빨갛게 변하고, 싸구려 코트는 추위를 막아주지 못할 테니까.
"도와줄까요?"
무리 중 한 아이가 눈을 들고 내게 온다. 새빨간 손과 붉은 꽃핀 볼, 입김 후우 내뱉는 추운 겨울.
"만들 수 있어요. 새하얀 눈사람은 아니어도. 그렇죠?"
자세히 보니 눈이 아니라 눈사람이었구나. 흙탕물이 섞인 탁한 눈사람. 어릴 때 좋아하던 눈사람은 아닌 것도 같은데. 아닌가 어쩌면 가장 온전한 눈사람 같기도 하고. 괜히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기분 탓인지. 아이도 그걸 봤는지.
"그러면 눈이 다 녹아요."
왜 갑자기 온몸이 뜨거워졌는지 알 길이 없었는데. 눈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다시금 차게 식는다. 왜 가슴은 뜨거워지는지. 시리게 내리는 눈발에서 내가 무엇을 찾았길래.
"이 눈사람, 줄게요."
"너한테 귀한 거잖아."
"만드려고 한 거지 간직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언젠간 사라질지도 모르고... 그래도 즐거웠으니까."
손에 툭 던져주고 무리에 섞인 아이를 보자니 가슴이 다시금 뜨거워짐을 느꼈다. 난 눈사람이 하얗고 아름다워서 좋아했었는지. 그 만드는 순간이 아름다워 좋아했었는지. 흰 눈 위에 툭 툭, 떨어지는 눈물방울. 색이 변하는 하얀 눈. 내가 포기한 무언가.
보세 코트를 대충 잠그고, 추위를 맞는다. 가벼운 눈송이에 마음이 무거운 것은 추위 탓이라고. 장갑이 없어서 시리운 손. 더러운 흙탕물에 섞인 눈사람.
"하고, 하고 싶었어.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정말..."
거세지는 눈발, 눈사람은 하얗게 변하고. 그 싸구려 코트 위에 서서히 적시는 눈발. 하얗게 물든 세상, 뜨거운 가슴, 그리고 그의 손 위에 눈사람.
올 겨울은, 조금은 뜨거울 것이라는 눈사람의 바람.
내일 녹아 없어진대도 뜨거운 눈사람.
내일 차게 식는대도 괜찮을 이 뜨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