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알고 있었어, 너의 그 상처

by 유월

친구와의 술자리였다. 오랜만에 본 대학동기. 전하지 못한 근황과 여러 고민을 나누는 자리였다. 술이 역하게 느껴져 소주를 싫어하던 내가 고른 건 스파클링 타입의 술이었다. 짠- 건배하는 술잔에 이야기들을 더해갔다.

"어떤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 그래서 물어보기 어렵기도 해."

웃으며 짠하던 내가 멈춘 것은. 친구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게 묻고 싶지만, 물어보지 못한 스스로의 답답함이었겠지.

술잔에 보글보글 탄산감, 그래도 은근히 남아있는 알코올의 향. 그날은 조금 취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네게 아빠 이야기를 한 적이 없구나.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빠는 어찌 보면 실없고 가벼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재밌는 사람이기도 했다. 함께 있으면 즐거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난 그게 퍽이나 좋았다. 엄마보단 아빠에 대한 애정이 더 컸다. 항상 밥 챙겨주시고, 머리를 묶어주시던 것은 엄마였지만. 그래서 아빠에 대한 감정이 더 복잡했다. 죄의식이 날 따랐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1학년 초반엔 잠시 급식을 먹지 못하는 기간이 있다. 아빠 직장이 가까워 아빠가 내 점심을 챙기러 오셨는데 그래서 난 그 기간이 참 좋았다. 아빠와 함께 먹는 점심이 좋았으니까.
점심은 대부분 햄버거집의 어린이 세트 아니면 김밥이었다. 김밥은 그런 기억으로 남았다. 한 줄을 먹으면 배고프고, 두 줄을 먹으면 남길까 걱정하던 내 마음을 아시곤 "아빠가 먹으면 되니까 두 줄로 든든하게 먹어." 얘기해 주셨던 일. 지금 돌이켜보면 그리 대단한 말도 아닌데 그 말이 좋았다.
햄버거도 그랬다. 장난감을 다 모아가는 순간이 좋았다. 해당 캐릭터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억지로 좋아하게 되었다. 아빠가 너 이거 좋아하지 하고 건네어주시는 순간이 좋아서. 콜라의 탄산, 귀여운 장난감, 작디작은 그 햄버거 포장을 벗겨내 주시던 아빠. 그런 소소한 순간들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었다.

점점 커가며 아빠의 무능력함이 조명되었지만 아빠에 대한 애정은 변치 않았다. 아빠는 늘 즐겁고, 재밌는 사람이었으니까. 세상 아무도 몰라준대도 나만은 아빠를 이해해 주겠다는 다짐 때문이었을지. 아빠가 사주신 곰인형이 하나 있었는데 그걸 내 품에 항상 끼고 다녔다. 잘 때도, 어딜 가든 함께 했다.
집 사정이 몹시 어려워져 도망치듯 이사를 가던 그날에도 난 인형을 꼭 안았다. 좋은 날이 오겠지. 그 어떤 순간에도 원망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려워진 이후에는 가정 내 희생양, 영웅을 자처하고 나섰다. 엄마가 하는 아빠이야기, 아빠가 하는 엄마 이야기를 들었다. 좋은 이야기는 당연히 없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를 비방하는 이야기가 좋았을 리가. 제일 어린 내가 아런 일을 자처한 것은 내가 가장 아빠를 좋게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을 반복한다면 언젠간 나아지겠지 라는 오만한 생각 때문이었다.
상황이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결국 나는 비참하고, 한심해졌지만. 그래도 아빠를 미워하지 않았다. 나의 부족함이라고 내가 더 잘 해내면 되는 일이라고 떠올렸다. 그런 애정이었다.

아빠와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고, 중학교 시절 왕따를 겪고 매일 좌절감에 시달리던 내게 아빠는 가볍게 이야기하시는 일이 잦았다. 내가 좋아했던 '즐거운 아빠'는 더 이상 없었다.
죽고 싶어 했던 나를 보고 '아직도 죽고 싶은 거야?'라는 가벼운 말도. 친하던 친구들이 등 돌리고 떠나 왕따가 된 내게 '여전히 친구가 없니?'라는 아픈 말도. 여전히 옥상에 가냐고 묻던 그 말에 조금씩 아빠에게 따져 물은 적은 없었다. 왕따 당한 내가 잘못이다 떠올리고 그냥 묻었다.

고등학교 1학년, 성적 이야기로 오랜만에 말을 걸어오신 아빠께 너무 불쾌감이 들어서. 내가 이과인지, 문과인지 아냐고 소리쳐 따지던 그날들이 떠올렸다.

"×가지 없이 어디서 대들어!"

그 말을 들을 때쯤엔 나를 원망했다. 사랑하지 말걸. 이렇게 상처받을 거라면 애초에 더 어릴 때 좌절하고 실망할 것을.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고작 이 정도의 사람이구나. 외면한 모든 게 다가옴을 느꼈다.
오래 외면한 상처는 곪아터져 아프다. 오래 방치한 만큼 낫기가 어렵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래서 더 증오했던 것 같다.
그날은 끝까지 아빠와 맞섰다. 내가 좋아하는 건 아냐고, 잘할 때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못하는 것 같으니 관심 가지는 거냐고. 그 말들은 되려 내게 가장 아팠다. 한 마디, 한 마디 가슴에 박혔다. 어릴 때 내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어쩌면 어릴 때 모든 관심은 너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지 않았겠냐고. 그날은 인형을 안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탄산감이 가득한 술잔이 역해서. 어릴 적 먹던 햄버거의 콜라와는 달라서. 차가운 술잔에 맺힌 물기들에 괜히 눈이 빨개지니까. 그런 이유였어. 아빠에 대해 한 마디 하지 못한 것은. 역한 탄산감에 술을 비우지 못하고. 내뱉지 못한 많은 이야기.

상담에서도 아빠의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웠던 것은, 그런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