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바람을 맞으러 나가는 길
지긋지긋한 여름이 와. 뜨겁고, 붉은 여름이 와. 더위에 취약한 나는 대처할 수 없는 여름. 타오르는 숨, 벅찬 호흡과 호흡.
유리컵에 얼음을 와르르 쏟는다. 청아한 소리가 머리를 때린다. 물을 마시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탄산음료를 꺼내든다. 어제 개봉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탄산감은 남아있다. 어제보단 아니지만.
차가운 음료를 벌컥 마신다. 머리가 띵해지는 시원함. 여름의 맛을 즐긴다.
에어컨을 잘 틀지 못했다. 아무리 좁은 자취방이래도 전기세가 부담되어 끽해봐야 제습으로 틀어둔다. 오늘은 냉방으로 틀까 고민하다 탄산음료를 마셨으니 버틸 수 있을 거라며 웃음을 흘렸다. 더운 열기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얼음이 쉬이 녹아 밍밍한 음료가 되어버리겠지만.
생활비의 부담은, 내가 아직 어떤 것도 이룬 적 없는 머무르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의욕을 상실하고, 이불 위에 누워있기만을 반복했다. 탄산음료를 마실 때도 깨끗한 잔이 없어서 급히 이 잔만 설거지를 해냈다. 이 기회에 미리 다 설거지를 해둘까 고민을 했지만 결국 발라당 이불에 누워버리고 만다.
여름옷은 부피감도 작은데, 옷장은 늘 무너지고 만다. 차곡차곡 쌓아 올리기가 쉽지 않다. 입맛이 없어서 매번 대충 맨밥을 먹고 탄산음료를 마신다. 가끔 밥 먹는 걸 까먹고 음료를 마시는 바람에 속이 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밥을 먹었던가."
속이 쓰린 걸 보니 밥을 먹지 않은 것도 같았다. '풋' 비웃고, 물기 서린 잔을 흔든다. 손가락에 물기가 매달린다. 얼음은 빠르게 녹아내린다.
"운동이라도 해보면 좋았을 텐데."
매 순간 그저 누워서 시간 보내기를. 가만히 있으면 시원하다던데 그렇지도 않지. 난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는데도 호흡이 거칠어지잖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에 선풍기를 결국 작동시킨다. 금세 시원해지겠지. 얼음잔은 아직 차갑고, 내 열기는 뜨겁고.
다시 눕는다. 아 아무리 음료수래도 바로 눕는 건 좋지 않은데. 덥다, 열기가 사라지지 않아.
-
몇 분이 지났을까 창밖을 보니 30분도 지나지 않은 것도 같은데. 깜빡 잠이 들었던 것도 같고. 불 꺼진 방보다 여전히 밖이 더 환하게 햇살이 드니까 깊게는 잠에 들지 못한 것도 같고. 끼익- 소리를 내며 달달달 돌아가는 선풍기 소음에 잠을 못 이룬 것도 같고.
물기 서린 컵은 바닥에 물이 흥건해졌다. 닦아내려면 꽤 오래 걸리겠지. 언제 저렇게 다 녹아버렸담.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얼음컵을 주시해 본다.
'얼음은, 다 녹았네. 밍밍한... 탄산음료.'
몸을 벌떡 일으켜 무심히 잔을 잡는다. 약간의 냉기는 남았지만, 축축한 이 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는다.
"더럽게, 뜨겁지. 여름은 냉정하게, 매정해."
잔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탄산. 한 모금조차 더 마시고 싶지 않은 밍밍한 맛. 땀이 흐른다, 유리잔에서도 주르륵 물방울이 더 떨어진다. 달달 떨리는 선풍기 따위는 말리지 못할 물방울. 밖은 뜨거운 햇살을 내뱉는데도. 저 열기가 궁금해진 것은 무엇인지. 뜨거울 거란 생각에 한 번도 발을 내딛지 않았었는데.
가득 찬 싱크대에 유리잔을 담근다. 무작정 샤워기를 틀고 씻는다. 씻고 나오니, 바로 열감에 땀방울이 맺힌다. 대충 쌓인 옷들을 꺼내 입고 밖으로 나선다. 모자를 쓸까 고민한다. 세상은 아직 너무 밝아서 눈을 뜨지 못할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고민 끝에 모자는 쓰지 않는다.
땀이 미친 듯이 날 것 같은 뜨거움, 탄산감에 속은 쓰리고. 대충 잠들어 약간 멍하고. 온몸에 땀이 흐르는 것도 같다. 광활한 열기에 숨이 잠시 막혀 어쩔 줄 모른다. 발걸음을 돌려 집에 갈까 고민하며 한 발자국을 겨우 옮긴다. 그때에 바람이 불어온다. 머리칼도, 온몸도 날릴 시원한 바람. 아니 어쩌면 뜨거운 바람이지만. 이 물기를 날려버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너무 밝다 세상이, 너무 냉랭하다 세상이."
무엇에 울컥했는지 알 수 없지만. 혼자 조용히 읊조리고, 괜히 싱긋 미소를 짓는다. 오랜만에 외출이었지 아무래도. 덥다는 핑계로 밖을 나온 적도 없었어. 어쩌면 뜨거운 열기가 시원할 거라는 걸, 믿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무기력한 나는 모를 오늘이었을 것이다.
혼자 되뇐다. 오늘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설거지를 해야지. 에어컨을 틀어야겠다. 냉방으로. 꼭 제습 아닌 냉방으로 틀어야겠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오싹하게, 그러나 서늘하게.
태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걸음이 빨라지니 더 이상 덥지 않다. 땀도 날 새가 없다. 격한 운동에 호흡이 거칠어진다. 이 호흡은, 나의 선택이었다. 숨이 턱 막히지 않는다.
가는 길엔 탄산음료를 사야겠다. 그건 아무래도 버려야겠어. 이번엔 캔으로 사야겠다. 한 입에 다 털어 넣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