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 많다면 영어실력보다 철판을 올려주세요
지난 일요일 바로 어제. 드디어 미루고 미루던 셀핍을 치고 왔다. 난리 났던 주말 날씨 내심 시험일정이 변경되지 않을까 했지만 심상치 않은 이민 뉴스들에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제 날짜 제 시간에 치고 왔다. 삼 년 전 컬리지 졸업을 앞두고 게으른 나 자신을 너무도 잘 알아 마지막 프로젝트 제출 후 바로 아이엘츠를 보고 왔었다. 그렇지 않고선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영어실력에 관대했던 터라 공부 한번 하지 않고 봤던 시험 결과는 처절한 기본 평균. 누구나 맞을 수 있는 5.5점. 니 영어 실력? 그저 그래^^ 이렇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흘러 2년이 지나고 그 마저도 유효기간이 끝나 풀에 있던 내 프로필도 사라졌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을 무렵 나태해진 내 모습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무작정 book 한 시험일정. 근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지만 공부를 하려고 앉으면 브런치를 켜서 글을 쓰고 갑자기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많아져 벌떡 일어나 청소도 하고 청소하고 나니 몸이 찝찝해서 샤워도 하고 그러다 보니 배도 고프고 뭘 먹으려 했더니 결국 냉장고에 먹을 게 없어 굳이 걸어 나가 식재료를 사 오고 어찌어찌했던 공부시간은 아마도 총 8시간 남짓?(한달 내도록)
300 언저리의 금액은 나에게 반성을 주기 쉽지 않았나 보다. 결국은 그래, 내 영어실력이나 한번 보자 하고 이른 오전 일어나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시험 컨펌 이메일을 보면 시작 전 45분 전에는 무조건 도착해 있어야 하고(사실 그렇진 않은 거 같았으나 시험 입장 전 등록하고 주머니 검사 등까지 하면 걸리는 시간인 듯) 시작 15분 전에는 입장이 불가하다는 말이 있어 여유롭게 1시간 10분 전 출발했다.
그래도 시험 전인데 강의라도 볼까 하고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를 켜고 우버를 불렀다. 그때부터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하고 입이 말랐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씨 때문에 천천히 서행하며 도착 한 곳은 영 앤 애글링턴. 아로마커피 건물로 들어서니 셀핍 관계자가 로비에서 안내를 도와주고 계셨다. 그분에게 오늘 시험을 치러 왔다고 하니 준비됐냐는 물음에 벌써 시작인 건지 아 응 글쎄 준비가 됐어야 하는데 말이야 하고 멋쩍게 웃었다. 그분이 엘리베이터를 눌러주셨고 안내를 받아 30층으로 올라갔다. 화장실부터 들리고 줄을 섰다. 문이 두 개에 줄이 두 개였는데 하나는 아이엘츠 그리고 다른 줄은 셀핍이었다. 그러니 꼭 줄을 서 있을 때 다른 한 줄이 비었는데도 본인에게 여기 줄로 오라고 하지 않는다면 (다른 로케이션도 아이엘츠와 셀핍시험이 같은 시간대에 시작일 수 있으니) 꼭 본인은 셀핍을 보러 왔는데 이 줄이 맞는지 물어보시길.
진심이 안 느껴지는 환영한다는 인사와 번호가 적힌 가방을 주시는데 거기에 모든 짐과 소지품 그리고 휴대전화를 안내하시는 분 눈 앞에서 끄고 모두 같이 넣으면 된다. 그래서 겨울이라면 재킷 부피도 있으니 최대한 간소하게 하고 가는 게 편할 것 같다.
그 뒤 시험을 등록해 주시는 분과 대면을 하게 되는데 쌀쌀맞지만 나라도 이런 날씨에 나와서 일하는 것이 썩 내키진 않을 테니 personal 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신분증 검사를 하고 사진을 찍으시는데 나는 내가 못난 얼굴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웬걸 긴장 가득한 얼굴에 눈 밑 지방이 더 불룩해 보이는 것까지 나왔다. 그 뒤 주머니 검사, 소매검사 발목검사 등 공항검색대 뺨치게 심각한 분위기로 시험장 입장 준비를 마쳤다. 입장할 때도 안내해 주시는 분이 한분 한분 자리 안내를 해주시는데 문 바로 앞자리에 내 사진이 떡하니 걸려있어 거기서부터 사실 웃참을 했다. 웃참지옥 시작이었다.
시험 전 헤드폰이 잘 나오는지 등을 검사하고 시험을 시작했다. 시험 치는 동안 느낀 게 공부는 둘째치고 어떤 순서로 시험이 나오는지는 생각보다 중요한 것 같다. 대략 이런 문제가 이 다음 나오니 노트 테이킹을 해야지 혹은 나 같은 소심이 들은 남들이 아직 리딩을 하고 있는데 나 먼저 라이팅을 할까 봐 (시끄러운 타자소리) 걱정이 돼서 리딩이 몇 파트까지 있는지도 모르고 매 순간 긴장 하며 다음장을 넘기진 않을 테니 말이다.
리스닝이 첫 시작이었는데 어느 지점부터 아주 잠깐 정말 몇 초정도 끝나고 일층에 있는 아로마에서 맛있는 카푸치노 한잔을 마시고 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벌써 몇십 초가 휘리릭 흘렀고(체감은 1초 였음 정말로)하필이면 못 들었던 부분에서 4문제가 나와 너무 당황했다. 리스닝에서는 절대 딴 생각 1초도 하지 말고 세상에 있는 모든 집중력을 다 써서 절대 놓치지 말길!
리딩은 뭐 내가 제일 약했던 부분에다가 일찍이 포기를 하고 갔었기에 입을 댈 건 없다. 공부를 안했으니 안한만큼 나올 것이다.
드디어 라이팅. 나는 업무 상 이메일을 쓸 일도 많고 우리 팀들이랑도 아주 친해서 간혹 서로 이 이메일이 좀 어그레시브 해 보이진 않는지, 화난게 보이는지, 뭔 말인지 클리어하게 읽히는지 서로 체크해주기 때문에(캐내디언들도 회사일을 하다보면 빡치는 일이 많지만 나름대로 화를 누르고 이메일을 씀. 사람 사는 것 똑같음)사실 라이팅은 어렵지 않았다. 나왔던 문제들도 내가 지금 회사에서 하고 있는 일에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일이라서 비교적 쉬웠다. 점수는 나와보면 알겠지만..
그 뒤 스피킹 지옥이 시작되었다. 라이팅을 마친 지도 모르고(2 tasks인데 3 tasks라고 착각) 무작정 Next버튼을 누른 뒤 갑자기 스피킹이 나와서 너무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왜냐하면 시험 특성상 나 혼자 스피킹을 시작하면 모두가 내 말을 들을 수 있고(굉장히 조용함 정말로) 그들이 라이팅을 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았다. 또 스피킹 특성상 누구랑 얘기를 하는 척이나 내가 진짜 누군가에게 전화로 어드바이스를 하는 등 좀 연기를 하며 해야 하기에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그런데 그런 걸 다 떠나서 갑자기 아까 시험등록해 주시는 분이 내 뒤로 와서 서 계셨다. 아니 왜요... 당신은 해드폰도 안 끼고 있어서 내가 하는 말 다 들리잖아요... 일단 너무 창피해서 집중도 안됐고(내 연기에 방해됨) 첫 문제 자체에 내가 너무 당황해서 해야 할 말을 정리도 못한 채로 말을 줄줄이 해야 해서 자꾸 쓸데없는 Uhm umm이 반복됐다. 이에 너무 웃기고 민망하고 바보 같아서 웃음을 참느라 어이없이 한 문제를 날려야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 감독관이랑 눈도 마주쳤다. 어떻게? 모니터로... 거기서도 웃참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시험을 치다가 그림을 보고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두 개 나왔는데 그때는 진짜 친구랑 대화하는 것처럼 슬랭도 나왔고 좀 비꼬기도 했다. 무도회장에서 브리저튼 같은 옷과 가면을 쓰고 춤추고 있는 부분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아니 지금이 2025년인데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자기들이 쿨한 줄 아는 거야 뭐야 이렇게 말이 나와서 이걸 나중에 들을 감독관이 생각 나 민망했다. 그래서 다시 사실 쿨하긴 해 라고 하려 했는데 시간이 다 됐다. 그러고 몇 개 더 나온 문제 이후 시험이 끝나고 손을 들었다. 원래는 3시간 시험이라는데 9시에 들어가서 2시간 뒤인 11시 정각에 나왔다. 대충 친 건 아니었는데 괜히 마음이 창피해졌다. 아니면 혹시 실수로 한 타스크를 통째로 스킵했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좋은 것은 일단 영어점수는 곧 만들어질 것이고 다시 아이알씨씨에 내 프로필을 만들어 넣어 둘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시험을 다시 볼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 창피했는지 기억을 하고 있어서 이젠 철판이 필요한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번에 친 것보다는 더 문제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사실 좀 재밌는 경험이었다. 일단 나한테는 더 심각한 분위기였던 아이엘츠보다는 나았다.
모쪼록 누구든 셀핍을 준비하고 있다면 일단 부끄러움부터 없애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