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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Jun 08. 2020

유월의 첫 바람

선풍기 꺼낸 날

 집안 온도가 27도와 27.5도 사이를 오갔다.

해가 비춰드는 곳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미묘한 수준이었을 뿐 확실히 지난주보다 집안은 더워졌다. 서쪽으로 난 창을 통해 길게 들어오는 해가 부엌을 달굴 때면 집을 얻을 때는 역시 남향으로 얻어야 한다는 부모님 말씀이 맞다는 생각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거실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이 집은 동향, 아침이면 동쪽으로 난 창을 통해 거실이 달궈지고 저녁 직전에는 서쪽으로 난 창을 통해 부엌이 달궈진다. 한여름이 되면 부엌은 라면만 끓여도 찜통처럼 후끈해진다.


 빨래건조대에 널린 빨래를 걷고 바닥을 쓸고 텔레비전에 쌓인 먼지를 닦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동안 등에 땀이 배어났다. 아직 콧등과 이마에 맺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름이면 찾아오는, 무력하고 지치게 하는, 더위가 느껴졌다.


 (해가 침범하지 않아서) 서늘한 방바닥에 앉아 플라스틱 부채로 부채질을 했다.

언젠가 알라딘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사고 사은품으로 받았던 부채.


 부채의 한쪽 면에는 "저는 생각했어요.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사람의 고독에 대해서요. 이제 그만 화해하지 그래, 라고 참견할 사람도 없는 외로움.", 다른 면에는 "그 두 사람, 오직 두 사람만이 느꼈을 어떤 어둠에 대해서" 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넋놓고 앉아 손을 열심히 움직여 부채질을 하다가,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사람의 고독'을 보고 문득 외로워졌다. 부채질 속도를 더 올려보았지만 외로움의 속도만 빨라질 뿐 바람은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다. 얇고 가벼운 플라스틱 부채가 만들어내는 바람에서는 일시적이고 인공적인 냄새가 났다. 오래 지속되면서 외롭지 않을 바람이 필요했다.


 작년에 찬바람이 불면서 베란다 구석에 내어놓았던 선풍기를 찾았다. 죽어버린 꽃나무를 뽑아내서 말라붙은 흙만 남아있는 커다란 화분과 구부러진 훌라후프와 파란색 아이스박스를 옆으로 밀고 겨우 선풍기를 꺼냈다. 한손으로 번쩍 들어서 거실로 옮겼다.


 선풍기에는 먼지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베란다로 나갔을 때부터 지금까지 쌓인 먼지들.

오래되어서 철망에 검게 달라붙은 먼지부터 최근에 쌓이기 시작해서 훌훌 날아다니는 먼지까지. 코가 간지럽고 재채기가 났다. 물티슈로 철망부터 닦았는데, 안쪽은 손이 닿지 않아 드라이버로 나사를 풀어서 날개를 꺼냈다. 투명한 날개에는 더 많은 먼지가 있었다. 오래된 먼지는 끈적이며 잘 닦이지 않아서 힘을 줘서 닦다가 날개의 날카로운 부분에 손이 베이기도 했다.


 날개와 철망과 몸체를 다 닦은 선풍기를 다시 원래대로 조립했다. 그리고 플러그를 꽂고 바람을 눌렀다.

미풍 약풍 강풍. 차례대로 다 눌렀다. 어쩌면 이렇게 시원할 수가!


선풍기 바람이 '오직 두 사람의 어둠과 고독' 을 시원하게 날려보냈다. 내가 누른 유월의 첫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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