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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Sep 22. 2020

소문의 시작

 오랫동안 그늘에 눌려있던 초록을 건져서 두껍고 납작한 주걱으로 천천히 저으면 그런 색이 나오지 않을까.

덩어리진 채 미끈거리는 물풀로 뒤덮인 탁하고 어두운 빛깔의 늪이었습니다. 기다란 잎이 축 늘어져 갈색으로 시들어가고 있는 나무들이 잠겨 있어서 해질 무렵에는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곳. 늪은 사시사철 물비린내를 풍겼는데 한여름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열기를 뿜어내고 비릿한 냄새가 심해져서 속이 뒤집힐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그곳에 자전거가 떠올랐습니다. 진한 파란색 어린이용 자전거였는데 바퀴살이 부러지고 흐물흐물해진 타이어가 위를 향한 채였습니다. 안장이나 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잠겨 있는 부분은 꺼내기 전까지 상태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늪은 불투명했으니까요. 자전거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육지로 나가는 배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바닷가 선착장으로 향하던 방앗간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아픈 이를 치료하기 위해 치과에 가야했기에 그날의 첫 배를 타러 가던 길이었다고 했습니다.


 마을에서 선착장으로 나가려면 보통은 마을회관이 위치한 큰길이나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소나무숲길을 통해 갑니다. 샛길, 그러니까 마을사람들이 늪지라고 부르는 곳으로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물론 앞서 말한 할머니처럼 늪지로 다니는 사람도 가끔 있었죠. 늪지는 마을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럴 때조차 사람들은 늪을 쳐다보지 않고 되도록이면 서둘러 지나가려 했습니다. 늪에 닿으면 빠져죽는다는 소문이 마을을 떠돌다가 미신으로 자리 잡다가 언젠가부터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으로 굳어졌으니 두려웠던 거겠죠. 치매에 걸려 집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술에 취해 귀가하다가, 바람에 날린 모자를 건지려다가 늪에 빠져죽었다는 소문이 떠돌던 곳입니다. 밑창 없는 슬리퍼나 올이 풀린 털모자 같은 것들이 늪에 떠있기만 해도 소문은 급속도로 부풀려져 퍼져나갔습니다. 그곳에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처럼 격렬하게 피어올라 아무리 잘라내도 끊어지지 않는 집요한 형체를 지닌 채 말입니다.


 소문이 사실인지는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소문이 생겨나는 것 자체가 중요했죠. 늪에서 생겨난 소문이 생성되고 퍼져가는 사이, 마을에서 지루하고 고단한 일상을 잠시 잊은 사람들의 입가에는 정체모를 미소가 번졌고 눈에는 생기가 돌았습니다. 이토록 좁은 마을에서 소문만큼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존재가 또 있을까요.

 그러니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확인할 수 없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합니다. 늪에 떠오른 파란색 자전거는 분명 제 자전거가 맞습니다. 다만 저와 같은 반인 P가 그걸 타고 가다 늪에 빠졌다는 건 그저 소문이 아닐까요. 저는 학교 운동장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제 파란색 자전거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던 P에게 공짜로 자전거를 주었을 뿐입니다. 답례를 하겠다는 P에게 우리집에 오는 지름길을 알려주었다는 사실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겠죠. 설마 그 아이, 어스름한 저녁에 늪지를 자전거로 신나게 달렸던 걸까요. 폭이 좁은 늪지에서는 늪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히 살펴야 한다는 것은 마을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참, P가 우리 마을에 살고 있지 않았다는 건 깜빡했군요.


 등교하는 아침, 늪지는 평소와 다르게 긴장과 흥분이 뒤섞인 마을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저는 잠시 멈춰섰습니다. 자전거는 아직 늪에 빠진 채로였습니다. 물풀이 묻어있는 자전거 페달에 송장개구리가 올라앉아 한참 눈알을 굴리다가 늪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땀에 젖은 셔츠가 등에 달라붙는 걸 보니 여름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늪에서 풍기는 냄새처럼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문이 맹렬하게 퍼져나갈 차례가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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