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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Sep 29. 2020

우리동네 대동탕

수증기로 뿌옇던 좁은 그곳에서

 대동탕은 산동네 비탈이 시작되는 입구에 자리잡은 목욕탕이었다. 유명한 갈비집의 기다란 담벼락이자 축대 옆에 바짝 붙은 목욕탕은 도로보다 낮은 곳에 있어서 비탈을 오르면서 내려다보면 거리가 멀어질수록 점점 밑으로 가라앉는는 것처럼 보였다. 붉은 벽돌형태의 굴뚝에는 대동탕이라는 이름이 하얗게 적혀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선명했던 이름은 자음과 모음의 모서리부터 부스러져갔고 나중에는 자음 몇 개와 부서진 모음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래도 동네사람들에게 그곳은 동네 하나뿐인 목욕탕으로 이름을 따로 부르지 않아도 목욕탕에 가자거나 목욕탕에서 만나자고 하는 약속은 당연히 그곳으로 통했다.


 나는 대동탕의 오랜 단골이었다. 기억의 범위에 들어오지 않을 때부터 초등학교 때까지 다녔으니 십년은 넘게 다녔을 것이다. 아주 어릴 적에는 엄마와 다녔겠지만, 기억이 영화의 한장면처럼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는 네다섯살에는 아빠와 다녔다. 요즘은 목욕탕 출입 나이제한이 있어서 만 4세가 지나면 남자는 남탕, 여자는 여탕이 당연하게 되었지만 오래전 그때는 '스스로 부끄러울 때까지' 나이를 상관하지 않고 다니곤 했다.

 특히 여탕에는 엄마들이 데리고 온 아들들이 많았는데, 가끔씩 같은반 남자아이를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의 기억 대부분이 그렇듯 희미하고 놀란 표정 정도만 떠오른다. 학교에서 개구쟁이였던 남자아이는 나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냉탕과 온탕을 뛰어다니며 물장구를 치며 마구 떠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얌전해져서 구석으로 가서 조용히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서둘러 목욕을 마쳤다. 여탕에 들어왔으니 본인이 더 창피했던 걸까. 다음날 학교에서 마주치면 평소처럼 서로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그 아이는 부끄러워하며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일부러 그 아이를 쳐다보곤 했다. 네가 잘못 들어왔으니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 앞으로 까불지 말라는 마음이었던 걸까. 내가 쳐다볼수록 그 아이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아빠가 우리 삼남매를 목욕탕에 데리고 다녔던 것은 아마 이삼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매주는 아니었고 엄마가 피곤하거나 몸이 좋지 않을 때 가끔 데려갔다. 우리는 아빠와 목욕탕에 가는 것이 좋았다. 엄마와 달리 아빠는 뜨거운 물에 오래 몸을 담그지 않아도 때를 제대로 밀지 않아도 머리를 감지 않아도 혼을 내지 않았다.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고 물에서 실컷 놀 수 있는 기회였다. 비누, 샴푸, 때타월과 수건을 담은 목욕바구니 속에 엄마는 가끔 사과를 챙겨서 넣어주었다. 목욕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먹으면서 하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목욕탕에 도착하면 우리는 냉탕에 사과를 던져놓고 차가운 물속에서 물장난을 치고 수영을 하며 신나게 놀다가 배가 고파지만 사과를 씹어먹었다. 한참 놀다가 추워지면 온탕에 들어가서 몸을 데운 다음 대충 씻어내고 수건으로 닦고 휴게실에 나와서 선풍기 바람이 쐬었다. 몸에는 퉁퉁 불어있는 때를 고스란히 담은 채 쭈글쭈글해진 손에 아빠가 건네는 바나나우유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삼남매의 팔꿈치와 목에 그대로 남아있는 때와 불량한 두피상태를 지적하면서 아빠에게 '목욕탕에서 애들 잘 하는지 보라고 했더니 이게 뭐냐'고 화를 냈다. 엄마의 화에 대한 아빠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내가 애들 뭐하는지 잘 봤는데 왜 그래."


 예나 지금이나 아빠들은 애를 (눈으로만) 잘 본다. 보라고 하면 정말 보기만 한다. 젊은 날의 아빠도 그랬다. 우리가 물장난을 치고 사과를 먹는 걸 보시기만 했다. 그래도 그때 삼남매가 목욕탕에서 사과를 먹는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으셨는지 아빠는 종종 그때 이야기를 꺼내신다.


 아빠가 목욕탕에 데리고 간 다음주에는 어김없이 엄마의 완벽한 때밀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더 묵은 때를 벗기기 위해 엄마는 따뜻한 물에 몸을 오랫동안 담그라고 했다. 만약 숨이 막히거나 답답하다는 이유로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물에서 뛰쳐나오면 곧바로 등짝스매싱이나 날카로운 야단을 들어야했기 때문에 살이 부들거리며 때가 밀려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했다. 엄마는 온몸의 때를 다 밀겠다는 각오를 한 것처럼 때를 박박 세게 밀었다. 너무 세게 밀어서 살갗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진물까지 난 적도 있다. 엄마에게 몸을 맡기고 때를 밀 때는 등도 아프고 다리도 아팠지만 특히 겨드랑이와 옆구리를 밀 때는 그 고통에 배에 이르렀다. 아프다고 몸을 접거나 소리를 지르면 일종의 응징을 당했기 때문에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때를 밀 때 엄마는 지긋지긋한 숙제를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때가 뭣이 그리 중하길래 저렇게까지 밀어야하나 짜증이 났는데, 당시 엄마는 아이들의 몸에 있는 때를 모두 밀어내고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중에 직접 때를 밀어보면서 내 몸에 있는 때를 미는 것도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세 아이의 몸에 있는 때를 모두 밀어야한다는 건 엄마로서는 정말 해치워야할 숙제였을 것이다. 아이들이 꼬질꼬질해보이는 것이 싫었고 엄마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자신들의 몸인데도 우리는 몸에 붙은 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어쩌면 관대하기까지 했으니)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때를 밀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당시 내게 엄마와 오는 목욕탕은 숙제검사였고 아빠와 함께 가는 목욕은 소풍이었다. 목욕 후 결과도 확연히 달랐다. 엄마와의 목욕은 깨끗하고 반질거리는 피부를 남겼고, 아빠와의 목욕은 허연 각질과 떡진 머리를 남겼다.

 

 대동탕은 온탕 2개, 냉탕 1개, 샤워기 4개와 플라스틱 의자와 대야, 바가지밖에 없는 작은 목욕탕이라서 사람들이 조금만 많이 들어와도 숨이 막혔다. 평일에는 한가했지만 대부분 주말에 목욕탕에 갔기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일부러 토요일 늦은 오후에 가서 목욕을 마치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거나 일요일 새벽에 가곤 했다.

  명절이 다가오면 어떤 시간에 가도 사람이 많았는데, 특히 명절 전날 즉 만날 늦은 오후에 가면 사람들에게 밀리고 채여 목욕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 시간을 비켜서 목욕을 가면 될 텐데 굳이 엄마는 꼭 그 시간에 목욕탕에 데려갔다. 큰집 맏며느리였으니 명절 전까지 준비해놓아야할 음식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대동탕신발장은 물론 옷을 보관하는 옷장도 꽉 차서 목욕탕 주인은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를 주며 거기에 옷을 담아두라고 했다. 옷장 위로 플라스틱 바구니들이 쌓여갔다. 목욕탕 안은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차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내 눈높이에서는 어른들의 가슴과 배 근처만 보였다. 비누향과 샴푸향이 수증기에 떠도는 좁은 목욕탕에서 뜨겁고 미끈거리는 몸들을 헤치고 엄마가 자리를 잡아놓은 곳에 앉았다. 얼굴이 벌겋게 익은 채 목과 어깨만 내놓고 있는 사람들이 다닥다닥 몸을 붙이고 몸을 담그고 있는 온탕 옆이었다. 엄마는 온탕에 들어가서 때를 불리라고 했지만 숨이 막히고 속이 울렁거려서 도저히 물속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힘없이 때를 밀고 온탕에 있는 물을 몸에 끼얹었다. 그리고 머리를 감기 위해 샤워기가 있는 곳으로 갔다가 줄이 너무 길고 이리저리 밀려서 냉탕에 있는 물로 샴푸를 했다. 서둘러 수건으로 몸을 닦고 목욕탕 휴게실로 나와서 선풍기 바람을 쐬었다. 사람이 많아서 바람을 쐬이는 것도 줄을 서야했다. 내 차례가 돼도 어른들에게 밀리기 일쑤였다. 목욕탕에서 틀어놓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한참 후에 엄마가 나왔다. 얼굴이 익은 엄마는 재빨리 선풍기 바람을 쐬어 머리를 말렸고 바나나우유를 사서 내게 건넸다. 휴게실에서 아무개의 아내, 아무개의 엄마, 출신고향, 장사하는 가게 이름으로 불리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손에 이끌려온 아이들을 다 만났다. 아이들의 손에는 바나나우유가, 아주머니들의 손에는 박카스가 들렸다. 내일이면 만나게 될 시댁식구들에 대한 걱정과 집구석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과 불성실한 남편들에 대한 불만과 성토가 선풍기 바람 사이를 오갔다. 맨몸이어도 속옷만 걸치고 있어도 서로에게 부끄럽지 않았던 그런 날에는 엄마도 내 팔꿈치에 허옇게 남아있는 때를 보고도 못 본척 해주었다.

 

 목욕탕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오 분에서 칠 분 정도 걸렸다. 산동네에 살 때는 오 분이었고, 여덟 살때 이사한 뒤로는 칠 분이 걸렸다. 목욕탕을 나와 저녁 어스름을 걷는 엄마의 얼굴이 말갰다. 명절 음식을 다 장만해서 후련했던 걸까, 목욕을 깨끗이 해서 개운했던 걸까. 자주 피곤하고 예민했던 엄마도 목욕을 한 다음에는 모든게 풀린 것처럼 편안해보였다. 걸어가면서 나는 집에 도착하면 먹을 저녁 반찬과 텔레비전에서 하는 주말 프로그램을 생각했다. 슈퍼 앞을 지나다가 엄마가 브라보콘이라도 하나 더 사주면 행복했다. 이대로 걸어가면 우리집 대문이 나올테고 그 문을 열면....내가 알던 모든 세계가 있었다.

 지금은 열리지 않는 초록대문. 다시는 열리지 않을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동네 목욕탕.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엄마처럼 숙제를 하듯 때를 밀어본 적은 없다. 날마다 샤워를 할 수 있으니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게 된 것 같다. 목욕탕에 가면 숨이 막히고 속이 울렁거려서 30분을 못 넘기고 나오는편이라서 거의 가지 않지만 가끔 주말에 할 일이 없어나 피로가 쌓였을 때는 목욕탕에 갔다. 요즘은 목욕탕에 목욕을 하러 가는 것보다 놀러가는 편이 많을 것 같다. 만화카페를 연상시키는 수많은 만화책과 예쁜 카페 인테리어, 다양한 메뉴가 있는 매점과 식당, 키즈놀이터와 게임기, 수면방과 동굴방, 아이스방, 불가마가 있고 목욕탕 내부에도 온탕, 열탕, 이벤트탕, 유아풀, 폭포탕, 안마탕은 물론 습식사우나, 건식사우나까지 있다. 하루 종일 있어서 지루하지 않을 모든 것이 갖춰진 일종의 놀이공간.

 

 며칠 동안 가을이 오는 것도 모르고 선선해진 바람과 하얀 구름을 무심히 흘려보냈다. 그러다 이번 추석에는 못 만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엄마와 통화하다가 문득 오래전 목욕탕이 떠올랐다.수증기로 뿌옇던 좁은 목욕탕에서 뜨겁고 미끈거리는 몸을 헤치고 앉아 때를 밀던 기억이 함께 밀려들었다. 다시는 찾아가지 못할 그 공간에서의 추억이 새삼 소중해져 괜히 팔꿈치를 만져보는, 추석 이틀전 화요일이다.




 코로나19가 시작된 뒤로 대중목욕탕에 한번도 가지 않았다. 원래 가는 걸 즐기지는 않았으니 2년은 넘은 것 같다. 그래도 가끔 날이 추워지고 어깨가 굳으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질 때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음 내키면 슬리퍼를 신고 그냥 편하게 가고 바나나우유도 사먹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요즘이라서 더 소중하게 떠오르는 동네 목욕탕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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