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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Oct 03. 2020

늪.

 바람이 불면 늪의 표면에는 미세한 움직임이 생겨났습니다. 막이 생긴 초록색 표면에 가는 주름이 생겼다가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사라졌습니다. 손을 대지 않아도 무겁고 끈적끈적한 질감이 느껴졌습니다. 시냇물의 찰랑거림이나 파도가 철썩임과는 달랐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쉽게 속을 들여다볼 수 없고 사시사철 적요가 감도는 그곳이 나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람이 찾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지만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고 편하게 있을 수 있기에 이토록 최적의 조건을 지닌 곳은 없었습니다. 소문이 부풀어 갈수록 늪을 향하는 발길은 줄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찾지 않을수록 잠자리와 검은나방과 물노린재가 늪을 뒤덮을 정도로 수없이 날아다녔습니다. 나는 책가방을 베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무성한 나무에 풀 사이로 작고 보잘 것 없는 하늘이 보였습니다. 날씨에 따라 쉽게 변하는 하늘보다는 늪이 훨씬 대단해보였습니다. 나는 늪 주변에 자란 풀이나 꽃을 잘근거리며 씹다가 심심해지면 다른 일을 찾았습니다. 


 늪 주변에는 붉은쥐가 많았습니다. 쥐는 제 손바닥한 몸집에 작은 귀와 짧은 다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뾰족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수염과 털 없이 매끈한 꼬리가 몸집보다 길어 전체적으로 그 모습이 이상해보였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쥐를 붙잡아서 가위로 수염과 꼬리를 잘라보았습니다. 싹둑. 꼬리가 너무 쉽게 잘려나가 조금 놀랐습니다. 수염과 꼬리가 잘린 쥐를 손바닥에서 내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쥐는 어디로도 가지 않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가위에 붙어있는 연한 살점을 풀잎으로 닦아서 책가방에 넣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저녁 먹을 시간까지는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찾으러 올지도 모르니까요. 해가 지기 시작하려는지 늪을 둘러싼 나무와 풀과 작은 생명들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해는 모습을 감추기 직전 늪은 짧고 불안한 정적에 감싸였습니다. 부서질듯 위태로운 침묵. 저는 그 시간의 늪을 완벽하게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어둠이 깔린 늪은 잘 보이지 않아 조심하며 걸어야 했습니다. 폭이 좁아 자칫하면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잘 살펴야 했습니다. 늪을 다니는 마을사람이라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입니다. 


 집은 늪이 끝나는 지점과 마을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의 중간에 있었습니다. 집 앞에는 비닐장판을 깔아놓은 평상이 놓여있고 그 옆으로는 오래전부터 감이 열리지 않는 감나무가 한 그루 서있습니다. 감나무에 슈퍼라는 글자가 적힌 나무 문패가 매달려있었습니다. 판유리가 달린 나무문에는 담배, 술, 과자 같은 단어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습니다. 오래전 할아버지가 불러주는 대로 제가 반듯하고 크게 적었던 글씨들입니다.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음료수를 넣어두던 냉장고와 아이스크림을 담던 작은 냉동고, 과자나 라면, 술과 담배를 올려두었던 작은 진열대가 보입니다. 한때 팔 만한 물건으로 가득 차있었다는 슈퍼에는 더이상 살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마을에서는 여전히 슈퍼라고 불렀지만 이곳에 무언가를 사러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때 슈퍼였던 곳에서 저는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낮에는 집앞 평상에서 담배를 피웠고 해가 지면 집안으로 들어가 슈퍼에 하나밖에 없는 작은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술을 마셨습니다. 방문을 열면 할아버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았다가 왔냐, 하고 한마디 말을 하고 이내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여름 내내 저녁 밥상에는 미역냉국과 마른멸치가 올랐습니다. 저는 미역냉국에 밥을 말아먹었고 할아버지는 마른멸치에 술을 마셨습니다. 텔레비전에서 각 지역의 맛집과 음식들이 소개될 때마다 저는 어떤 맛일까 잠시 상상하다가 미역을 삼키면서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어릴적부터 맛을 다양하게 접하지 못한 사람에게 텔레비전에 나오는 음식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맛은 어린 내게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배우지 못하고 일찍 굳어버린 이 감정처럼 말입니다.


 번들거리는 초록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옥상바닥은 오후가 될수록 뜨거워졌다. 무더위가 이렇게 이어지고 있는데, 지군은 대체 언제까지 늪 이야기를 계속할 셈인가.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어 텁텁해진 입안을 콜라로 헹구며 말했다. 

-지군, 그렇게 한가하게 늪 이야기나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지금 소문이 퍼지고 있어요. 

지군은 손등으로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대답했습니다.

-손이 끈적끈적하군요. 사람들 입을 거치면서 먼지 달라붙은 채 굴러다니는 사탕처럼 소문과 비슷하게. 

-L과 사귀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닌가요?

-누가 보느냐에 따라 사실 여부가 달라질 수 있겠죠. 일단 저에게 있어서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쯤 되자 나는 속이 답답해져 다그치듯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지군은 L을 좋아했나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지요. 누구나 L을 좋아하잖아요. 예쁘고 상냥하고.

 지군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무엇에도 관심이 없어보이는 나른한 표정. 나는 그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똑바로 쳐다보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L을 좋아한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 정도가 아니라 격렬히 짝사랑 중이다. 안절부절못하고 입술을 깨물고 있는 내게 L을 좋아하느냐고 지군이 물었다. 순간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콜라를 급하게 들이켰다. 지군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아도 좋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혹시 소문이 퍼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싶었다. 나는 입가에 묻은 콜라를 닦아내며 일부러 무심한 듯 말했다. 

-누구나 L을 좋아하잖아요. 예쁘고 상냥하니까.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누가 심었는지 모를 상추와 오이가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는 옥상에는 마른 가지만 남은 화분들이 많았다. 나는 가끔 그곳에서 지군과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짧은 점심시간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지군의 이야기를 길게 들어준 적은 없었다. 평소에는 사소한 잡담 정도만 하고 작업장으로 돌아갔는데, 오늘은 L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알아듣지도 못할 지군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L은 벌써 사흘째 무단결근 중이다. 회사에서 연락을 해보았지만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L이 사라지기 전날밤 지군과 만났으며 둘이 싸우는 걸 봤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L의 결근이 지군과 관계있을 거라는 의심을 했다. 나는 L의 행방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계속 다른 말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혹시 L이 왜 회사에 안 나오는지 알고 있나요?

 굳은 내 얼굴을 살펴보던 지군은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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