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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Jun 19. 2020

책상 앞에 걸린 바다

이탈리아 포르토피노

 며칠 전에 라디오에서 랜선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시사프로그램인데 일주일에 한 번씩 영화나 책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 모양이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코로나19, 여행이 끝난 시대'라는 제목쯤 됐던 것 같다. 진행자가 자신은 국내여행은 자꾸 뉴스를 듣거나 봐야 하기 때문에 해외여행을 선호한다고 하며 그런 식의 제목에 굉장히 안타까워했다. 출연자는 진행자를 달래는 목소리로 '여행의 종말은 아니고 코로나 19로 인해 랜선 여행이 늘어났다'는 말을 했다. 현실적으로 직접 여행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랜선으로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소심하고 낯을 가리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라서 나의 여행지 목록은 빈약하다.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안 가본 곳이 훨씬 많다. 막상 떠나면 여행을 꽤 즐기는 편인데 문턱을 넘어가기까지가 참 어렵다. 랜선 여행은 이런 내게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계획했던 여행을 취소하고 몇 차례나 가자고 약속만 했던 소풍도 다음 기회로 미루는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 답답함이 쌓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직접 여행을 갈 수 없다면 내가 머무는 이곳에서 여행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알찬 여행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내 방 여행하는 법>에는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여행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요즘이라면 손쉽게 랜선을 즐기겠지만 이 책은 1794년에 씌여졌다. 결투를 했다는 죄목으로 42일간의 가택연금형에 처해진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자신이 머무는 공간을 여행하기로 한다. 작가는 '내 방 여행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면서 침대, 의자 등 익숙한 가구에서부터 추억과 문학, 예술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방안 곳곳에서 새로운 여행을 이어나간다. 자신이 머무는 공간을 벗어나면 할 수 없는 여행. 가까이 있는 익숙한 사물과 공간을 낯설게 보기. 직접 가는 여행이 아닌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여행.


 랜선 여행과 집안 여행. 코로나 19가 가라앉을 때까지 시도해볼 만한, 의외로 재미있을 것 같은 여행인 것 같다. 그리고 요즘 나는 그런 여행을 시작한 것 같다. 내 방이 따로 없는 관계로 내가 주로 있는 공간은 거실 창가에 있는 책상인데, 책상 앞에는 이탈리아 포르토피노가 걸려있다. 6월이 시작된 뒤 하얀 커튼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셔 빛을 차단할 목적으로 인터넷에서 가리개 커튼을 하나 주문한 것이다. 여름이니까 시원한 그림을 걸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SEA COAST IN PORTOFINO'가 적힌, 알록달록한 집들이 푸른 바다를 향해 있는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탈리아 포르토피노.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인터넷을 뒤져 블로그 리뷰와 동영상을 찾아보았다. '언젠가는 가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코로나19 상황과 문턱을 넘는 것이 가장 힘든 내게 그날이 언제가 될지....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커피부터 끓인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책상 앞에 앉아 낯선 이탈리아 바다를 한참 쳐다본다. 바다가 걸린 창문을 열면 푸른 바다가 밀려들어올 것만 같다. 현실은 창틀에 앉은 비둘기와 눈이 마주치거나 버스 지나가는 소리만 밀려들어오지만. 그래서 바다가 걸린 쪽의 창문은 좀처럼 열지 않는다. 여행 중에는 현실을 잊고 있는 것이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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