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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Jul 15. 2020

좁고 깊어, 막힌

레일라 슬리마니 <달콤한 노래>

  루이즈는 완벽한 보모였다. 아이들을 돌보고 살림을 꾸리고 집안을 빛나는 곳으로 바꾸는 동안 쉴 틈 없이 일을 해도 그녀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매끈한 뺨과 푸른 아이섀도와 붉은 립스틱을 바른 단정한 얼굴, 매니큐어를 바르고 좋은 향기를 풍기는 깨끗한 손. 그녀가 언제부터 보모로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소설에서는 루이즈의 삶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자신의 삶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는 스물다섯의 루이즈와 보모일을 계속하다 마흔을 넘긴 현재의 루이즈를 보여줄 뿐이다.

 허약한 기반 위에 올려진 그녀의 삶은 좁다. 좁아서 다른 것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깊어지기만 한다. 깊어서 하나의 감정이 들어오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쉽게 빠져나가지 못해 머무르다 고여버린다. 고여있으려니 고독이 갈수록 거대해진다. 고독이 거대해지니 혼자 꾸는 꿈이 많아진다. 꿈이 많아지는데 이룰 수 없으니 분노가 솟는다. 분노가 솟는데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닫힌 문 앞에서 참담한 현실마저 덮쳐온다. 참담한 현실을 무시하고 싶은데 자꾸 쫓아오니 증오가 인다. 증오가 이는데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없으니 행복해지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좁고 깊은 세계에서 끌어올린 행복은 가능해 보이지 않았고 실현되지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집에서 사랑했던 아이들과 자기 자신을 해친다. 아망은 죽었고 밀라는 죽을 것이고, 그녀는 의식불명에 빠졌다.


  지난밤 <달콤한 노래>를 읽었다.

젊은 부부와 아이 둘이 있는 중산층 가정에 완벽해 보이는 보모가 들어와서 육아, 살림을 완벽하게 해 놓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 잡는다. 보모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쓸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른 아이가 생겨나서 자신의 쓸모를 이어가기를 바라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모는 극한 상황에 몰려있었다. 파리 근교의 빈민촌에 사는 보모는 살풍경한 자신의 원룸보다 돌보는 아이들이 있는 파리의 아파트를 더 집처럼 여겼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괜찮았다. 젊은 부부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보모를 기적을 일으키는 요정처럼 대하며 마음의 문도 살짝 열어보였다. 그리스의 어느 섬으로 여름휴가도 함께 갔다. 가족처럼 가까워졌다고 착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고 더 이상 보모의 손길이 필요치 않은 시기가 다가오고 보모의 행동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자 부부는 문을 닫았다. 보모의 자리는 저곳, 우리 가족의 자리는 이곳. 선을 그었다. 평생 보모로 살아온 루이즈가 갈 곳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소설 어느 곳에서 루이즈 자신만의 세계는 없었다. 루이즈에게는 완벽한 보모라는 이름이 걸맞은 세계밖에 없었다. 불어나는 빚과 방세를 감당하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에 속해있으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외면하기만 했다.


 "몸속에서 증오가 솟아오른다. 증오는 그녀에게로 와서 노예근성과 어린아이 같은 낙관을 저지한다. 모든 것을 흐려놓는다. 그녀는 슬프고 혼란스러운 꿈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다른 이들의 내밀한 삶, 그녀는 절대 가질 권리가 없는 내밀한 삶을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들었다는 느낌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돈다. 그녀는 한 번도 자기 방을 가져보지 못했다."    -<달콤한 노래> 중-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루이즈는 완벽한 보모일 뿐이다. 흐트러짐 없는 얼굴 아래 감창백하고 피곤한 민낯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루이즈 자신조차도.

 루이즈를 위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그녀는 늘 이방인으로 살았다. 공원에서 만나 친해진 다른 집 보모 와파에게 루이즈는 그리스의 섬으로 갈 거라는 말을 한다. 사랑에 빠질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냐는 와파의 질문에 루이즈는 이렇게 말한다. "아, 그건 아니에요. 이제 누구든 내가 챙기거나 신경을 쓰거나 하니 않으려고 거기 가는 건데.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그렇게 하려고." 이루어질 수 없는 달콤한 노래.

 결국 루이즈는 누군가를 돌보는 삶에서 자신을 위한 삶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그리스의 섬에서 보냈던 짧은 여름은 오래전 끝났다. 생은 그녀에게 두 번 다시 눈부신 햇살과 바다를 내어주지 않았다.


  "행복감에 이어 낙담의 나날들이 이어진다. 세상은 점점 줄어들고 움츠러들어 그녀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다. 폴과 미리암은 그녀에게 문을 닫았고, 그녀는 그 문을 부수고 싶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다. 그들과 함께 세상을 이루고, 자기 자리를 찾고, 그곳에 거주하는 것, 몸을 숨길 둥지 하나, 따스한 은신처 하나를 마련하는 것. 가끔 그녀는 자기 몫의 땅을 요구하리라는 마음을 먹었다가도 곧 풀이 죽고 서글픔이 차오르며 무언가를 믿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한다."  

      -<달콤한 노래> 중-


 사건이 벌어진 뒤 형사는 수사를 위해 루이즈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녔지만 다들 루이즈를 잘 알지 못했다. 예전 집주인들은 좋은 보모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공원에서 만났던 다른 보모들은 루이즈와 말조차 제대로 나눠본 적 없었다. 루이즈의 세계가 극한으로 치닫기 전, 누군가 개입했더라면 그녀는 '다른 세계'로 들어서지 않았을까.




 <달콤한 노래>의 루이즈를 보면서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었다.


  1. 손보미의 소설 <임시교사>의 주인공 P부인

- P부인은 임시교사로 20년, 더 이상 교사를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보육교사로 노동을 이어간다. 임시라는 이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그녀의 삶에 자꾸 선을 긋는다.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식하고 있는 P부인이 택한 방식은 자기기만이다. 그녀는 삶에서 결여된 나머지를 그것으로 채운다. 육아와 살림까지 완벽한 보모. 젊은 중산층 부부의 가정에 위기가 닥쳤을 때 P부인은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도맡아 한다. 젊은 부부는 위기 속에서 P부인의 도움으로 성공적인 삶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부부와 P부인 사이에는 임시로 보모를 채용한 관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정의 위기가 지나가자 P부인의 헌신은 부부에게 불편한 것이 되어간다. 내 집처럼 편하게 지내라는 말은 중산층 부부가 보이는 형식적 친절에 불과했지만 P부인은 그 말을 믿는 실수를 범했다. 부부는 계약을 종료하고자 한다. 20년 동안 교사를 했지만 임시라는 이름을 떼지 못한 P부인은 모든 게 다 괜찮다는 말로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불행을 위안하며 덮는다.

 임시일 수밖에 없는 한계와 놀이터에서 자신을 다른 보모와 동일시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타인화하는 모습이 루이즈와 닮아있다.


 "사는 건 그런 거지. 그녀는 생각했다. 아, 괜찮을 거야. 언젠가 마치 끈 하나를 잡아당기면 엉킨 끈이 풀어지듯이 잘못된 일들이 고쳐질 거야. P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잠들기 위해 눈을 감는 건, 생각보다 언제나 쉬운 일이었다."

   -손보미 <임시교사> 중-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반복되었던 잘못된 선택, 착각, 부질없는 기대, 굴복이나 패배 따위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나 그런 식이지. 그녀는 항상 그게 용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녀는 그게 용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곤 했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때때로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어 질 때가 있었다. 삶이, 그녀 앞에 놓인 삶이 버둥거림의 연속이고, 또한 기도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 제발 내가 또다시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게 도와주세요. 그녀는 얼마나 자기 자신이 기도를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던가."   

  -손보미 <임시교사> 중 -



2.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 속 엄마와 젠.

- '나'는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병상에 누워있던 남편을 간호하고 어린 딸을 돌보기 위해 교사 직업을 그만둔다. 병원비로 인해 빚이 불어갔지만 남편은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교사 이후 도배장이, 유치원 통학 버스 운전, 보험 세일즈, 구내식당에서 음식 만드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며 노동을 이어간다. 끝없는 노동 속에서도 '나'는 임시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관절이 아플 정도의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 예순을 넘긴 나이 노인요양병원에서 요양사로 일하고 있는 '나'는 자신이 담당하는 환자 젠과 만난다. 젠은 평생 여성운동을 해왔고 수많은 아이들을 후원했지만 나이가 들어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은 뒤로는 요양병원에서 홀로 지낸다. 소설에서는 여성에 대한 차별,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혐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결국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사회적 약자에 속한 '나'는 나이가 들수록 직업 선택의 폭이 좁아지며 삶의 입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알고 불안하다.

 루이즈처럼 극단으로 치닫지 않지만 기댈 곳 없는 고립과 불안의 감정이 맞닿아있다.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로 보내질지도 모르고 누워 있는 저 여자가 왜 나로 여겨지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런 너무나도 분명한 예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기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게 저 여자의 탓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나는 이제 딸애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단념해 버린 걸까. 어쩌면 나도, 딸애도 저 여자처럼 길고 긴 삶의 끝에 처박히다시피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벌을 받게 될까.”  

                                        -김혜진 <딸에 대하여> 중-



3.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 나날>의 집사 스티븐슨. 영국 귀족의 집에서 평생 집사로 살아온 스티븐슨은 격동기의 세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 모르는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삶의 가치는 오직 귀족의 집을 관리하고 손님들을 대접하며 칭찬과 만족 속에서 평가될 뿐이다. 젊은 시절부터 영국 귀족 집안의 가치가 자신의 가치이며 그것을 가꾸며 관리하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고 여긴다. 집사의 품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인간의 품위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황혼에 이르러서 삶과 사랑의 상실에 대해 깨닫게 된 스티븐슨에게 여전히 삶에 대한 성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루이즈가 보모로서의 세계에 한정되어 있던 것처럼 스티븐슨은 집사로서의 세계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 자기 성찰이 부족하다는 점이 닮았다.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은 진실되고 가치 잇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그 야망을 추구하는 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 긍지와 만족을 느낄만하다."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 나날> 중 -



 

 <달콤한 노래> 속 루이즈는 곳곳에 존재한다. 멀리서 찾을 필요다. '임시'라는 이름표를 꽤 오래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나도 비슷한 셈이니까. 내년도 최저임금 1.5% 상승, 고용유지에 방점을 두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방점이 찍힌 '유지'가 잘 적용되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자신이 속한 세계에 빛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고 여겨질 때 누군가는 빛을 찾으려 하고 누군가는 빛이 들어오고 있다 자기 암시를 건다. 현실을 똑바로 보고 싶지 않을 때 자신을 타인화한다. 입지가 좁아질 때마다 고립감을 느낀다. 삶의 기반이 허약할수록 좁고 깊어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치와 가치관을 잣대로 다가올 날을 예측하고 계획한다. 루이즈를 읽으면서 떠올랐던 소설 중 어떤 방식이 가장 소설적이고 어떤 방식이 가장 현실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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