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이지 Nov 07. 2020

사슴벌레의 하루

열다섯 마리 애벌레는 무럭무럭 자라고

 사슴벌레 한 마리가 플라스틱 채집통 안에서 천천히 움직인다. 톱밥을 뚫고 올라와 주위를 살피더니 곧장 먹이목으로 올라가 곤충용 젤리를 천천히 핥아먹고 먹이목에서 내려와 바깥을 본다. 바깥이라고 해봐야 벽지와 책상과 침대, 그리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인간 하나가 있을 뿐이다. 별 볼 일 없는 세상이로군. 어제와 다름없는 풍경에 흥미를 잃은 듯 사슴벌레는 다시 잠을 자기로 한다. 톱밥을 헤치며 머리부터 집어넣는다. 머리와 몸통, 뒷다리를 마지막으로 사슴벌레는 톱밥 속으로 몸을 숨긴다. 낮 동안에 사슴벌레는 긴 잠을 자다가 어두워지면 다시 나와 먹이를 먹고 어두운 방을 보다가 잠시 날아보기도 할 것이다. 투명한 플라스틱 벽에 부딪혔다가도 잊어버리고 또 날 것이다.

 하룻밤이 지나고 채집통 이곳저곳에 사슴벌레의 흔적이 보인다. 이곳에 온 지 세 달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제 이름 없이 사슴벌레라는 명사로 불리는 사슴벌레.



 누구에게나 지루했올여름 장마. 게 이어지던 장마가 그치고 모기떼가 끓던 여름 막바지에는 해가 지면 나는 산책을 했다. 처음에는 동네를 작게 한 바퀴 돌다가 점점 범위를 늘려가 이웃동네까지 갔다. 낯선 골목을 느리게 걸으면서 낯선 집들을 보다가 오래된 생각에 빠졌다가 모퉁이를 돌다 막다른 골목이 나오면 깜짝 놀라곤 했다. 길이 막힐 수도 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이웃동네를 빠져나와 4차선 도로를 건너면 내가 살고 있는 익숙한 동네가 보인다. 횡단보도 앞에 도착했을 때 신호등 점멸신호가 깜빡거리며 다급하게 꺼져가길래 달렸다. 다행히 신호가 바뀌기 전에 건너편에 닿을 수 있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폴짝 뛰었다.

시커멓고 큰 것. (그래 봤자 그것의 입장에서는 내가 비교도 안 되게 크다. 거인 중 거인이다.)

그것은 덩치가 커서 그런지 천천히 움직였다. (그래 봤자 내 손바닥 반도 안 된다. 초코파이보다도 훨씬 작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찬찬히 살폈다. 진갈색 몸체에 머리에 날카로운 뿔이 돋아있었다.

 말로만 듣던 사슴벌레. 사슴벌레는 사람들이 오가는 인도에서 횡단보도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보통 사람 많은 곳에서는 날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날개를 다친 것일까. 윤기를 잃어 푸석해진 등은 열릴 줄 몰랐고, 날개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신호동을 지켜서 건널 것도 아닌데 왜 자꾸 횡단보도로 가려는 것일까. 사슴벌레가 사람들에게 밟힐 것만 같아서 다른 곳으로 옮겨주기로 했다.


  가까운 나무에 올려주려던 생각이 바뀐 것은 H가 사슴벌레나 장수풍뎅이처럼 크 단단한 곤충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H는 어릴 때부터 곤충들에 관심이 많았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눈을 떼지 않고 곤충들을 보았다. 집에 데려온 곤충들이 수없다. 개미 잠자리 메뚜기 사마귀. 모기와 나방과 바퀴벌레를 안 데려온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10대 후반에도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H는 아직도 곤충을 좋아한다. 여름마다 뒷산에 올라가 나뭇가지에 으깬 바나나를 넣은 봉지를 걸어놓고 한밤중에 장수풍뎅이가 바나나를 먹고 있으면 데려오겠다고 했다. 작년 여름에도 이번 여름에도 그랬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H는 규칙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그들의 하루를 지켜보면 마음이 편하다고 했었다. 나는 하룻밤만 묵어가는 조건으로 사슴벌레를 집에 데려왔다. (이에 대해 사슴벌레는 동의한 적이 전혀 없다)


  예상대로 H는 무척 좋아했다. 하룻밤만 데리고 있자는 내 말은 귓등으로 넘기고 당장 필요한 목록을 적기 시작했다. 첫날은 채집통에 얇게 자른 사과 조각을 넣어주었다. 사슴벌레는 사과를 조금씩 갉아먹었다. 둘째 날 톱밥이 깔리고 곤충 젤리가 놓였다. 셋째 날 젤리를 놓는 먹이목과 놀이목이 놓였다. 하룻밤이라는 기한은 이미 넘긴 지 오래되어 여름과 가을을 지내고 겨울을 앞두고 있다. 어느새 세 달이 지난 것이다.


 푸석했던 사슴벌레는 윤기가 흘렀다. 살이 올라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그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H가 사슴벌레가 외로울 것 같다며 마트에서 암컷 사슴벌레 한 마리를 사 왔다. 채집통을 새로 단장해서 두 마리를 함께 넣어주었다. 며칠 뒤 암컷의 행동이 이상했다. 자꾸 먹이목과 놀이목을 파내려고 했다. H는 알을 품었다는 증거라고 했다. 나무껍질을 벗겨서 그 틈 사이에 알을 넣어야 하는데 먹이목과 놀이목은 나무를 흉내 내어 만든 플라스틱이니 아무리 해도 벗겨지지 않았다. H는 진짜 나무로 만들어진 산란목을 사서 넣었다. 암컷은 열심히 산란목 곳곳을 벗겨서 벌어진 나무 틈 사이에 알을 낳았다. H는 알이 애벌레가 되기 위해서는 사육통과 영양톱밥이 필요하다고 했다. 열다섯 개의 사육통이 플라스틱 채집통 옆에 가지런히 놓였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열다섯 개면 열다섯 마리라는 건데, 다 애벌레로 번데기로 사슴벌레로 자란다는 말 아닌가. H는 꼭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애벌레는 중간에 죽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채집통을 청소하는 날이었다. 알을 낳은 이후 암컷과 수컷은 분리를 시켜두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채집통은 두 개였다. 두 개를 한꺼번에 청소하느라 잠시 암컷과 수컷을 한 곳에 두었다. 그런데 짧은 그 사이에 짝짓기가 이루어졌다. 아.... 아무리 곤충을 좋아하는 H라도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그날 하루 종일 고민하던 H는 결국 암컷을 뒷산에 보내기로 했다. 알을 낳기 전에 뒷산에 있는 적당한 나무를 찾아주어야겠다고 하면서 암컷과 곤충 젤리를 통에 넣었다. 너무 많아지면 곤란하니까 보내야지 맞장구치던 나는 문득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H, 암컷은 마트에서 사 왔잖아. 그럼 자연에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을 텐데 산으로 보내도 되는 거야?"

 H는 그런 건 생각을 못 해봤다는 얼굴로 멍하게 있다가 대답했다.

 "자연에서도 잘 살아갈 거예요. 사슴벌레로서 본능이 있을 테고 날씨도 마침 좋으니까요."

 H는 암컷을 데리고 뒷산에 가서 적당한 나무를 골라주고 빈손으로 내려왔다. 암컷이 무슨 잘못이람 알을 은 게 죄도 아니고. 알을 품었다고 뒷산으로 쫓겨나다니. 솔직히 수컷 잘못이 더 크지 않은가. 수컷은 왜 뒷산으로 보내지 않는 것인가. 내가 그런 말들을 하면 H는 수컷은 몸이 약하기 때문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H는 암컷이 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뒷산에 갔다. 놓아주었던 나무를 못 찾아서 생사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수컷 사슴벌레의 생활은 단조롭다. 밤에는 소리를 내며 날거나 벽을 긁거나 곤충 젤리를 먹고 깜깜한 방을 내다본다. 낮에는 톱밥으로 들어가 잠을 자다가 가끔 일어나 젤리를 먹고 환한 방을 내다보다가 잠을 자러 톱밥을 헤치고 들어간다. 요 며칠 사이 사슴벌레의 행동이 더욱 느려졌다. 몸에 윤기가 흐르고 살이 붙었지만 더 이상 날갯짓도 하지 않고 활발하게 놀지도 않는다. 너, 권태에 빠진 것인가.


 이름도 없이 이곳에서 세 달을 보내고 있는 사슴벌레가 밖을 본다. 벽지와 책상과 침대. 그리고 별 볼일 없는 인간 하나. 투명한 플라스틱 벽을 사이에 두고 나와 사슴벌레는 눈을 마주친다. 먼저 몸을 돌려버리는 쪽은 언제나 사슴벌레. 별 볼일 없는 세상이로군. 잠이나 자야지. 톱밥을 헤치고 들어가는 속도가 더 빨라진다. 이내 사슴벌레는 보이지 않는다. 가끔 톱밥이 가볍게 솟다가 잠잠해진다. 투명한 상자에 갇힌 시간이 고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