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이지 Oct 01. 2020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교보문고, 게으른 독서, 변신

 어제 저녁 밖에 나가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창문을 닫고 우산을 챙겼다. 이번 추석에는 보름달을 못 보는 건가 싶어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가로등이 비추는 곳마다 굵은 빗줄기가 그어졌다. 슬러퍼처럼 끈이 없는 블로퍼를 신고 삐죽 튀어나와 흔들거리는 보도블록을 밟고 금세 생겨난 물웅덩이도 밟으며 성큼성큼 걸었다. 발목에 빗물이 튀었다. 다들 어디론가 가버렸나 싶을 정도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저녁, 어느 아파트 꼭대기층에 켜진 노란 불이 따뜻해보였다.


 딱히 목적 없이 나와 지하철역 근처까지 걸었다가 근처 쇼핑몰 3층에 있는 교보문고에 들어갔다. 자주 다녔던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몇 달간 한번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책을 좋아한다고 해놓고 정작 책은 제대로 읽지 않는 게으른 독자라니. 교보문고에서는 옛날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나는 오래된 종이책 냄새는 나지 않고 디퓨저향이나 섬유세제향이 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곳에 카페가 있을 때는 커피냄새가 진하게 났다. 종이책 냄새가 없어도 나는 교보문고를 좋아했다. 숲 속의 서점. 이런 느낌을 주는 인테리어로 서점 입구부터 초록 덩굴이 기둥에서 천장을 타고 오르고 벽면 책장과 진열된 책 곳곳도 초록으로 무성하다. 물론 대부분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초록 식물이지만 가끔 진짜 나무도 있다. 초록이 일정하게 선명한 쪽이 가짜, 시든 잎이나 연하거나 진한 초록이 뒤섞인 쪽이 진짜.


 요즘 규모가 있는 서점에는 대부분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교보문고에도 당연히 그런 공간이 있다. 통유리가 시원하게 설치된 넓은 창가에는 기다란 곡선의 나무책상이 있어서 혼자 앉아서 책을 읽기 좋다. 신간이나 베스트셀러를 진열해놓아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책꽂이 주변에는 푹신한 쇼파가 E자 모양으로 놓여있다. 통유리 근처는 늘 일찍 오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나는 적당히 딱딱한 갈색쇼파에서 책을 읽곤 했다. 산만한 편이어서  책을 읽다가 주변사람들의 행동이나 말에 정신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교보문고의 쇼파에서 하는 짧은 독서를 좋아했다.


 어제 저녁에도 그 갈색쇼파에 앉아 책을 좀 읽다가 돌아가야지 하고 서점에 들어갔었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소파는 앉지 못하게 겹쳐서 올려졌고 그 주변은 출입금지용 테이프로 막혀있었다. 공원 벤치에서도 스타벅스 의자에서도 봤지만 서점에서 보니 점점 공간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더 실감났다. 괜히 쇼파 주위를 돌다가 신간과 베스트셀러를 진열해놓은 곳으로 갔다. 정치 분야의 베스트셀러는 자주 바뀌는 편이라 이번에도 바뀌어있었고, 문학분야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아몬드> 가 윗칸을 차지하고 있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이번에 창비청소년 문학상 수상작 <유원>도 좋았는데, 신간은 눈에 잘 띄는 곳에 꽂혀있지 않았다. 김훈의 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이 서점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김훈의 소설이 나온 것을 몰랐다. 사실 최근 다른 소설이 나오는 것도 잘 몰랐다. 언젠가부터 직접 서점에 가지 않고 온라인서점을 서성이는 시간이 많았으니 팝업창이나 편집장의 선택이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오는 책을 대충 어보고 말았다. 읽지 않아도 읽은 것처럼 요약해서 잘 설명해주는 설민석 선생도 있고 책에 관한 것이라면 약간의 검색을 통해서도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나의 독서가 게을러졌다...라고 하지는 말자. 서점의 서평이나 블로그 리뷰를 읽고 설민석의 요약 강의를 들어도 내가 직접 읽지 않은 책은 절대로 내 서재 목록에 넣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무슨 변명이 이리 궁색한 건지.

 

 고향 소도시에는 유명한 서점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역사와 전통이 깊은 시내 한복판에 있는 만남의 장소인 서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내에서 약간 벗어났지만 책을 읽을 의자를 따로 마련해두었던 규모가 큰 서점이었다. 크다고 해도 지금의 대형서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담했다. 언젠가 토요일 방과 후 나는 큰 서점에 갔다가 어떤 책에 푹 빠져서 점심도 거른 채 책을 읽었다. 그토록 강렬하고 슬픈 책은 처음이었다. 손에 땀이 배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일어섰을 때 주변 공기가 달라져있는 걸 느꼈다. 책을 살 돈이 없어서 제자리에 꽂아두고 집에 돌아갔다. 그 뒤로도 그 책이 읽고 싶을 때는 서점을 찾아갔다. 그런데 책을 읽기만 해서 장사가 잘 안 되었던지 어느날에 의자가 사라져있었다. 오랫동안 책을 읽고 있으면 직원이 와서 눈치를 주었다. 서점에서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나는 더이상 읽지 않아도 그 책을 완전히 내 속에 넣었다고 생각했기에 미련이 남지는 않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그 책은 바로 카프카의 <변신>이었다.


 한때 나는 책을 굉장히 좋아했고 즐겁게 읽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어떤 일보다 독서가 재미있었고 그 시간에 열광했다. 그런데 요즘 나는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독서에 집중하지 못하고 매듭을 제대로 짓지 못한다. 독서 뿐 아니라 다른 일을 하는 시간에도 비슷하다. 어느새 하루가 가있고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가고 한달이 뭉툭 잘려나간.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내가 걸친 스웨터는 양팔이 모두 풀려 너덜너덜해진 모양새다. 습관처럼 잡아당기면 스르륵 쉽게 풀어지는 시간들. 처음 내게 강렬하고 슬픈 감정을 안겨주었던 <변신>을 읽었던 그때처럼 땀이 배고 입술이 굳게 닫히는 독서를 할 수 있을까.

 

 교보문고에서 나왔을 때는 비가 그쳐있었다. 물웅덩이를 일부러 밟고 걸으며 나는 '변신'을 떠올렸다. 작고 창백한 보름달이 하늘 저 높은 곳에 떠있었다. 바람이 불어 달도 나도 몸을 파르르 떨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채털리 부인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