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가 약 95만명이며 사망자는 약 2만366명으로 추산된다는 기사를 읽었다. 연구진은 사망자 중에 천식이나 비염, 간질성 폐질환 등만 포함시킨 것이라고 했다. 그 외에 다른 질환으로 숨진 이들을 합산하면 사망자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제품판매 후 피해 발생까지 모두 1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아무도 살균제의 부작용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한 적이 없다. 폐가 나빠져서 숨을 쉬기 힘들어진 사람들은 이유를 모르고 자신과 가족들에게 닥친 불행 앞에 쓰러졌다.
가습기 피해자들 10명 중 만성적 울분 상태를 겪고 있다고 한다. 2019년 특조위에서 피해가정 100곳을 찾아 실태조사를 했는데, 피해자들 대부분은 심각한 울분을 호소했고 비관적 상황 때문에 실제로 자살 시도를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반인보다 4.5배 높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한순간에 무너져버린 삶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가습기살균제 최대 가해업체인 옥시는 검찰수사가 본격화된지 5년만에 겨우 사과를 했고 옥시대표들은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마트에서 샀던 가습기살균제 때문에 가족을 떠나보내고 호흡기와 연결된 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삶과 숨에 '합당한 보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걸까.
전국 마트의 매대에 놓여있었던 가습기살균제에는 ‘인체에 무해하며, 흡입 시에도 안전’이라는 문구도 붙어있었다. 유해성 실험보고서를 조작한 교수들이 드러났다. 옥시, 홈플러스, 롯데마트, 이마트 판매대에서 가습기살균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제품이었다. 마트에 가면 누구나 손쉽게 집어 들 수 있도록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김세희 작가의 <가만한 나날>에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 속 주인공 경진이 쓴 리뷰를 믿고 가습기살균제를 써서 피해를 입게 된 블로그 이웃이 있다. 회사의 업무 지시에 따라 진짜 같은 가짜 리뷰를 썼을 뿐인 경진은 모든 사태에 대해 가만히 있다. 가만한 나날을 보내며 그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사람이 된다.
경진은 첫 직장으로 마케팅회사에 취업했다. 신입사원은 모두 세 명. 그들에게는 영업팀 소속으로 블로그를 관리하고 의뢰받은 후기를 작성하는 업무가 주어졌다.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생생한 블로그의 주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첫 번째 업무였다.
경진은 첫 블로그의 주인으로 '채털리 부인'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남편과 멀리 떨어져 홀로 아이와 개를 키우는 외유내강형의 성격을 지닌 긍정적 성격의 인물이었다. 경진은 열정을 쏟아부어 채털리 부인을 실재하는 인물로 만들었다. 일상 게시글을 작성하고 주변인물들의 사진도 살짝 넣었다. 이웃을 맺고 댓글을 달며 친분을 쌓아갔다. 어느새 채털리 부인은 영향력 있는 블로거가 되었다. 그녀의 리뷰를 사실로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녀, 채털리 부인은 '신생아부터 6세까지 사용 가능한' 침대에서 아이를 재우고, 일본에서 수입한 '개 샴푸계의 샤넬' 제품으로 개를 목욕시켰다. 경진은 사촌언니가 자주 보내주는 조카와 대형견의 사진들과 일상을 블로그에 투입시켜 채털리 부인을 더욱 실감 나게 만들었다.
나는 아기의 옆모습이나 뒷모습, 그리고 개 사진을 가져다 썼다. 언니가 사진을 보내며 한 말까지 그대로 베끼기도 했다. 언니는 자신이 채털리 부인의 삶에 재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고, 나는 이후로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포스팅을 할 때 언니를 떠올렸던 건 아니었다. 언니의 삶은 그야말로 재료가 되었을 뿐, 채털리 부인은 어디까지나 내게 속한 인물이었으니까.
-김세희 <가만한 나날> 중-
채털리 부인에게 공을 들이는 동시에 주업무인 리뷰 업무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사실처럼 보이기 위해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풀어내는 리뷰를 작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경진은 수많은 유령 아이디로 맛집에 가서 봉골레 파스타를 먹고 성형회과에서 사각턱을 절제했고 치아교정과 라식수술까지 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라는 의구심은 후기 리뷰를 쓰면 쓸수록 무감각해졌다.
자신이 쓴 리뷰를 보고 누군가는 봉골레 파스타 맛집에 가고 옷을 샀을 것이다. 그런 정도야 실패해도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각턱 절제, 치아교정, 라식수술의 경우는 다르다. 업무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경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 외의 일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았다.
어느 날 채털리 부인은 광고성 글을 두 번 연속 올렸다가 저품질 블로그로 분류된다. 검색을 해도 뜨지 않는 블로그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채털리 부인의 블로그는 그렇게 영업팀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경진은 그동안 공을 들인 블로그를 삭제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
채털리 부인이 사라진 뒤에도 리뷰는 계속되었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블로그에서 수십 명의 사람이 되어 리뷰를 쓰던 경진은 11월 어느 날 밤, 블로그 이웃이라는 여자가 채털리 부인에게 보낸 쪽지를 보게 된다. 자신을 살균제 피해자라고 소개한 여자는 두 아이 중 갓난아기를 잃었고 다섯 살 아이는 폐가 손상돼 평생 산소 호스를 끼고 살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B기업의 살균제에 포함된 독성 물질이 원인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는 내용이었다. 쪽지의 마지막은 "채털리 부인님이 올린 후기를 보고 구매해서 쓰기 시작했거든요. 날마다 사용한다고 했는데 괜찮으신지... 아무 일 없으시길 바라지만 혹시나 무슨 일이 있었다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라는 글이 적혀있었고 그 아래로는 링크가 걸려있었다. 경진이 클릭한 링크에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채털리 부인은 어떤 글을 썼던가. 경진은 '기억나지 않는' 채털리 부인의 리뷰를 찾아보았다.
"침구며 패브릭 소파, 아기용품에 날마다 뿌리고 있다고. 간편한데다 마음까지 뽀송뽀송해지는 기분" "특히 아기 있는 집이라면 무조건 추천이에요~~^^"
경진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가 되었다는 여자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잔디밭을 배경으로 돗자리에 앉아있는 아이들과 함께 찍은 여자의 사진이 있었다. 처음에 경진은 여자가 찾아와서 따지고 법적인 문제가 되어 회사에 말썽이 생길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여자가 보낸 쪽지에서 항의가 아닌 채털리 부인을 걱정하는 마음을 보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경진은 살균제의 피해가 뒤늦게나마 밝혀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송이 진행되고 있으니 합당한 보상을 받겠지. 진심으로 그러길 빌었다. 기사에 실려 있던 사진들이 떠올랐다. 그 사람들은 살아 있고 숨을 쉬는 한 평생 산소통과 거기 연결된 호스, 호흡기에서 분리될 수 없었다. 나는 돌아누우며 생각했다. 그 사람들에게 합당한 보상이라는 게 뭘까. 그런 게 있을까.
-김세희 <가만한 나날> 중-
스물여섯 봄부터 스물여덟 여름까지 경진은 몇십 명의 사람이 되어 몇십 개의 블로그를 운영하며 리뷰를 썼던 직장에서 이십육 개월 동안 일했다. 그녀는 그때 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곳을 나온 이후로는 책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으며 어디에서도 그 책을 좋아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 마케팅부의 리뷰 작업에 투입되었을 때 경진은 '이래도 되는 건가?'라는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사각턱을 절제하는 리뷰를 올릴 때도 그런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각턱을 절제해서 행복해졌고 치아교정을 해서 행복해진 리뷰를 계속 올렸다.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첫 직장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의구심을 가졌다는 건 결과에 대한 의심과 불안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에 경진은 어떤 부작용에 대해서도 쓰지 않는다. 업체에게 의뢰받은 리뷰에는 좋은 제품이라는 '사실인 것 같은' 글만 필요했다.
'가만한 나날'은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가만히 있는 나날을 그린 소설이다.
"무너질 줄 몰랐어요." "다칠 줄 몰랐어요." "죽을 줄 몰랐어요." 그 한마디면 모든 잘못이 지워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한결같이 같은 말만 한다.
경진은 거대한 조직의 하단부 그중에서도 말단에 속하는 일원 중 하나일 뿐이다. 거대한 흐름을 주도할 수도 없고 영향력을 미칠 수도 없는 미약한 개인일 뿐이다. 그런데 그 미약한 개인이 만들어낸 '채털리 부인'이 쓴 리뷰를 보고 살균제를 사서 사용했던 블로그 이웃은 아이를 잃는다. '채털리 부인은 날마다 아기용품에 뿌리고도 좋다고 했는데 왜 우리 아기만 죽었을까.'를 곱씹으며 생각하다가 눈물이 어룽진 얼굴로 호흡기를 낀 채 살아가는 하는 다섯 살 아이를 돌보기 위해 몸을 일으켜야 했을 것이다. 경진은 정말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걸까. 물론 원인을 제공했고 모른 척 눈감아준 이들이 책임이 절대적으로 크다. 그럼에도 '채털리 부인'을 만들어내서 결국 피해를 입히게 한 경진은 책임에서 벗어나도 되는 걸까.
예전에 읽었던 소설인데, 그때는 정이현의 <오늘의 거짓말>과 비슷한 맥락이구나 했다가 전혀 다른 맥락이라는 사실을 오늘 새삼 깨달았다.
가습제살균제 피해뿐 아니라 사회적 질병에 대해서는 공동체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공동체가 가져야 할 책임과 공동체에 속한 개인이 가져야 할 태도'를 잊지 말아야겠다.
김승섭 교수가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 썼던 글로 가습기살균제 피해에서 시작된 김세희의 소설 '가만한 나날' 감상문을 마무리한다.
고통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회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트라우마에 대한 사회적 인식 공유를 통해, 명예회복-보상-처벌을 거쳐 사회관계 회복개선"으로 나아가는 사회적 치유작업이 함께 되어야 합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중-
개인이 맞닥뜨린 위기에 함께 대응하는 공동체, 타인의 슬픔에 깊게 공감하고 행동하는 공동체의 힘이 얼마나 거대하고 또 중요한지에 대해서요. 당신에게도 그리고 저 자신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당신과 나, 우리의 공동체는 안녕하신지요?
-<아픔이 길이 되려면> 중-
P.S : 가습기살균제가 유행이던 어느 날, 이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저도 가습기살균제를 하나 사서 집에 있는 가습기에 넣었습니다. 당시 8살이었던 아이는 가습기에서 올라오는 하얀 수증기에 얼굴을 자꾸 갖다 대며 재미있어했습니다. 가습기를 틀었던 건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가습기에 담긴 물을 제때 갈아주지 않아 찝찝해서 버렸거든요. 그해 가래 기침을 자주 하던 아이는 병원 단골이 되었고 어느 순간 폐렴이 되어 폐가 하얗게 되었다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일주일 동안 입원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인과 관계를 알 수 없어 폐가 왜 그렇게 나빠졌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2017년엔가 문자 하나를 받았습니다. 이마트에서 가습기살균제 구매한 내력이 있는 소비자들에게 보냈다며 증상이 있거나 피해사실이 있으면 링크를 걸어둔 전화를 연락을 해보라는 거였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가습기 살균제와 아이의 폐렴을 떠올렸습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지원종합포털'이었나 그쪽 번호였던 것 같은데, 전화를 해보니 '폐렴이 있었다고 꼭 가습기 때문이라고 특정할 수 없으니 입증이 돼야 한다, 입증이 되더라도 보상을 받을지는 알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병원에서 떼어올 수많은 서류를 불러주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피해자 개인이 보상까지 이르는 길은 참 멀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 뒤로 다시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폐렴으로 입원하기는 했지만 사실 가습기살균제 때문인지 저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도 아이의 폐가 좀 약한 편이지만 건강하게 자랐으니까 복잡한 절차를 밟고 싶지 않았죠.
가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질 때가 있었습니다. 총 피해 신청자 6,837명 중 5,770명은 판정이 완료, 그중 1,2단계 피해자 489명은 기업과의 합의가 완료되었고. 그 밖에도 특별구제계정 등 2,239명은 요양급여, 요양생활 수당, 특별유족조의금 등을 일부나마 지급받고 있지만 판정 대기자 1,067여 명을 포함하여 약 4,000명에 가까운 피해자들은 단 돈 10원도 지급받지 못한 상태라고 합니다. 피해사실을 알지 못하고 신고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고요. 피해자는 9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접수는 6천 명이 넘었을 뿐이네요. 코로나 시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중요해진 공동체의 힘, 직접 나서지 못하더라도 공감하고 공유하는 힘을 보여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안녕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