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화면 속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눈부신 여름이 펼쳐졌고 그 한가운데 최강희가 연기한 한여름이 서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가방을 싸고 자신이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를 둘러보는 한여름은 하늘을 자꾸 올려다보았고 그 빛에 눈이 부신 듯 손그늘을 만들었다. 해를 가리기엔 너무 작은 그늘에 한여름은 고개를 돌려 여행가방을 끌고 골목을 걸었다. 초록 나뭇잎이 여름 안에서 무성하고 매미 소리 쨍하게 한낮 더위를 찢는, 가감 없는 한여름의 풍경이었다. 미국에 언니네 집을 가기 위해 여행가방을 끌고 집을 나선 한여름이 걸어가는 길은 해를 피할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여름의 집은 높은 비탈에 있었던 듯 여름은 비탈을 내려가고 내려갔다. 뜨거운 해가 뒤를 쫓았다. 그늘 한점 없는 길을 여름은 하염없이 걸었다. 아무도 무엇도 그녀에게 그늘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간 며칠 뒤 여름은 언니 집에 침입한 괴한의 총에 맞아 죽었다. 휴가를 떠났던 언니네 식구들은 여름이 죽은 지 사흘 만에 집에 돌아왔다. 아무도 모르는 죽음. 사흘 동안 여름은 혼자였다. 드라마 1부 마지막에서 한여름이 죽는 장면이 나오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설마 이렇게 끝내지는 않겠지.' 하는 설마의 심정과 반전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2부를 보았다. 그런데 한여름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드라마는 1부에서는 한여름이 살고 있는 서울에서의 생활과 과거 자신이 만났던 남자들과의 추억을 보여준다. 서른일곱이 된 한여름은 방송국 작가로 일하면서 삶의 반경이 점점 좁아지는 자신이 초라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한여름에게는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 대학시절의 풋사랑, 프러포즈까지 받았지만 거절했던 아픈 사랑. 그리고 돌싱으로 썸만 타고 명확한 관계를 책임지기 싫어하는 방송국 라디오 PD인 제훈이 있다. 여름이 둘 사이의 관계를 물었을 때 제훈은 "일하는 사이"라고 못 박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다른 여자를 만난다. 한여름을 1부에서 죽게 만든 작가를 미워하고 싶었다. 이렇게 마음대로 죽여도 되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던 한여름을 왜 찰나의 생으로 그려놓았는지 묻고 싶었다.
드라마 2부에서는 각각 다른 장소에서 한여름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 남자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들은 한여름과 처음 만났던 시절을 추억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추억 속에 있는 한여름에 대해 잠시 슬퍼할 뿐 금세 털어내어 버리고 현실을 살아간다. 아니 털어내는 척을 했던 것 같다. 특히 프러포즈를 했다가 거절당했던 해준은 한여름이 일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여름의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방송국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괜찮지 않다는 걸 보여주었다.
한여름을 연기한 최강희가 너무 한여름 같아서 가슴이 시렸다. 눈부신 햇살 아래 있는데 부서질 듯 약해 보였고 하얗게 빛나는데 사라질 듯 희미했다. 슬프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내가 최강희라는 배우를 처음 알게 된 건 여화 '여고괴담'을 통해서였다. 친구들과 영화를 보다가 최강희가 복도 끝에서 순식간에 카메라 앞에 드드드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걸 보고 먹고 있던 과자를 쏟았다. 하얀 얼굴에 유난히 엷은 빛깔의 눈동자가 예쁘고 순해 보였던 최강희가 귀신이라서 더 놀랐던 것 같다. 그 뒤로 <달콤한 나의 도시> <달콤 살벌한 연인> <7급 공무원> 등 여러 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는 최강희를 보았다. 가장 잘 어울렸던 <달콤한 나의 도시>를 지내면서 처음 봤던 인상과 다르다는 생각을 했고 내가 보았던 엷은 빛깔이 좀 더 진해졌다는 여기고 있었는데, <한여름의 추억>에서 본 최강희는 무척 엷은 빛깔로 서있었다. 그래서 불안했고 오래 남았다.
드라마를 본 뒤 도서관에서 대본집을 빌려 읽었다. 드라마의 장면을 상기하며 대본집의 대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등장인물 몇 명이 빠지기는 했지만, 나머지 부분은 너무 똑같아서 드라마를 보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그 뒤로 <한여름의 추억> 드라마와 대본집을 일 년에 두 번 정도 본다. 한여름과 한겨울에. 올해 여름에 보았으니 겨울에, 다시 내년 여름에.
"이것 봐. 나는 그리 길지 않아. 이것 봐. 이렇게 찰나인걸." 어쩌면 이 문장을 다시 보기 위해 되풀해서 읽는 것 같기도 하다. 찰나에 지나지 않는 여름을 지내고 나면 무성한 초록과 쨍하게 울던 매미는 사라지고 찬바람이 불겠지. 오랜만에 아침 햇살이 눈부셔서 진짜 한여름이 온 것 같았는데 글을 쓰는 사이 다시 구름이 하늘을 채우고 있다. 그럼에도 비가 오지 않는 일요일, 찰나 속에 숨어있는 빛을 받으며 신나게 걸어봐야겠다.
여름을 지나고 있는 모두에게 평화로운 일요일이 되기를.
방송국 앞 아이스크림 집 야외 철제 의자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해원과 여름.
해원 장례식이?
여름 응. 외국에서는 장례식이 유쾌하대. 그 사람 좋은 곳으로 가라고 보내주는 의미가 있어서 다들 웃고 즐긴대.
해원 (이해 안 돼. 아이스크림 한입 먹으며) 조따 쿨하다.
여름 내 장례식도 그랬으면 좋겠어. (활짝 웃으며, 손 팔랑팔랑 흔들며) 안녕! 잘 가세요!! 가서 행복하세요!! 한여름 양!!
해원 (손까지 흔드는 여름을 창피한 듯 보며) 헐. 너 좀 이상해.
여름 (뭐가 대단한 걸 말하려는 듯) 그리구. 내 장례식에는.
해원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쳐다보면)
여름 내가 만났던 남자들이 다 와줬으면 좋겠어.
해원 (어이가 없네) 뭐?
여름 결혼식엔 못 오니깐 장례식에라도 와주면 얼마나 좋냐?
해원 (쟨 미쳤어. 절레절레) 사람이 곱게 늙는 게 중요하다니깐? 나처럼.
여름 엄청 빛났었던 것 같은데 (약간 시무룩) 단숨에 초라해졌어.
해원 (가만히 아이스크림 먹고 있으면)
여름 (쓸쓸) 꼭 누가 불 끄고 가버린 것 같애. 분명...사방이 빛이었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