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오르는 구릿빛이었고 어마어마하게 컸다. 태양 둘레의 하늘은 번쩍거리는 청기와 빛깔이었다. 주문에서 풀려난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봄날을 향해 달려갔다. 저 멀리 숲이 햇빛을 받아 이글거렸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마라." 아이들 뒤에 대고 선생님이 외쳤다. "두 시간밖에 없어. 길을 잃으면 안 돼!"
그러나 아이들은 어느새 하늘을 향해 얼굴을 쳐들고 따사로운 다리미처럼 뺨에 와 닿는 태양을 느끼며 달렸다. 아이들은 겉옷을 벗어던지고 팔뚝에 태양 빛을 쬐었다.
"태양등보다 훨씬 좋다. 그치?"
"훨씬, 훨씬 좋다!"
-레이 브래드버리 <온 여름을 이 하루에> 중-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을 읽다 보면 덧없는 젊음과 속절없는 시간, 영원한 상실해버린 풍경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빗속에 헤매고 있지만 태양을 기억하는 눈동자는 투명하고 쓸쓸해 보이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폐허가 된 곳에서도 과거의 온기를 기억하고 있다.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풍경을 떠올리는 눈동자에는 어찌할 수 없다는 슬픔이 깃든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올려다본 별은 빛나지만 예전의 별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이 서있는 위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북쪽에서 봤던 별을 남쪽에서 보는 것, 지구에서 봤던 별을 화성에서 보는 것, 어린이의 눈으로 봤던 별을 노인의 눈으로 보는 것. 자신의 눈동자에 비친 별은 언제나처럼 일정한 궤도 속에서 빛나지만 다른 시간과 장소에 서있는 '나'의 눈동자에 비친 별은 달라졌다. 별이 전하는 메시지는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정도에 따라 밝기를 달리할 것이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올려다보는 별은 쓸쓸하다. 푸른 들판에서 종일 뛰놀고 맑은 호수에 풍덩 뛰어들어 헤엄을 치던 날의 따뜻한 햇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SF 판타지 작가로 널리 알려진 작가의 작품에는 서정적인 요소가 깊이 깔려있다. 돌아갈 수 없으며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기에 더욱 절절해지는 애상이다. 최근 읽었던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도 비슷하게 느꼈던 정서이다.
처음 작가의 이름을 알려준 책은 <화씨 451>였다. '화씨 451'은 책이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이다.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미디어에 중독된 세상 속에서 상상력과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모든 책은 태워지고 독서는 불법이 되는 세상 속에서 주인공이 텅 비어있는 내면을 각성하며 인간성 회복을 위해 투쟁하는 내용이었다. 독서가 불법이고 모든 책이 불태워지는 세상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세계의 서사를 설득하는 과정에 감탄했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91세의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70년에 걸친 작가 생활 동안 여러 장르에서 작품들을 발표했는데, 특히 300여 편이라는 엄청난 양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작가의 연보를 읽다가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고,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라는 제시카 송이 생각나기도 했다. 작가는 자신의 여러 작품에서 '그린타운'이라는 이름으로 고향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고 한다.
<멜랑콜리의 묘약>과 <온 여름을 이 하루에> 두 작품집은 레이 브래드버리의 초기 단편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두 개의 소설집은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많다. 지구를 떠나 화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지구인들이 느끼는 절망과 향수, 당연하게 누리며 살았던 자연을 놓친 것에 대한 상실, 문명에 의해 파괴된 세상 속에서 문명적이었던 혹은 인간적이었던 면을 잘라낸 나머지의 획일적인 삶에서 생겨나는 균열 같은 것들은 작가의 여러 단편들에서 드러난다.
글머리에 인용한 구절은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온 여름을 이 하루에>에서 가져왔다.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을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태양이 비추는 풍경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들을 향해 선생님은 "두 시간밖에 없어."라고 외친다. 태양 대신 태양등만 보고 자랐던 아이들은 처음으로 본 태양에 매료된다. 선생님이 외쳤던 '두 시간'이 지나면 태양은 사라진다. 그리고 태양이 떠오르기 전처럼 다시 비가 내린다. 언제나처럼 7년 동안 그치지 않고 내릴 것이다. 다시 7년을 기다여야 진짜 태양을 볼 수 있다. 그때까지 아이들은 인공으로 만든 태양등 아래에서 살아갈 것이다. 웃고 떠들며 키가 자랄 것이며 그러는 사이마다 진짜 태양이 어땠는지 잊지 않기 위해 눈을 감을 것이다. 태양등에 속지 않기 위해 다시 만날 진짜 태양을 기억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 잊힐 것이다. 그치지 않는 비가 7년 동안 내리는 사이, 태양이 다시 떠오르기까지 젖어있을 세계 속에서.
짧은 단편 <온 여름을 이 하루에>에서 태양을 기다리는 아이들과 태양을 기억하는 소녀, 태양이 나오기까지의 날씨와 나오는 순간에 대한 묘사가 아름다워서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아이들은 얼굴과 몸과 팔다리, 손을 벌겋게 달아오르게 하는 태양의 온도까지 기억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조롭게 떨어지는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면 지붕과 산책길, 정원이며 숲에 투명한 구슬 목걸이가 흩뿌려져 있고 간밤의 꿈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태양은 꽃이라고 생각해요. 딱 한 시간만 피는 꽃.
문이 열리자 침묵 속에서 기다리던 세계의 냄새가 훅 끼쳐왔다.
침대 같은 숲 바닥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한숨을 쉬며 삐걱거렸다. 아이들은 나무 사이를 내달리며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서로 밀치며 숨바꼭질을 하고 술래잡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를 때까지 눈을 갸름하게 뜨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 노란 빛깔과 놀라울 정도로 파란빛을 향해 손을 뻗었고 신선하기 이를 데 없는 공기를 들이마셨으며 어떤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축복받은 고요의 바다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온 여름을 이 하루에> 중-
들판에서 마음껏 웃고 뛰놀던 아이들. 태양이 나오자 그들 대다수는 태양을 바라보는 일만 했다. 처음으로 본 태양을 음미하고 잊지 않기 위해 눈물이 흐를 때까지 눈에 담았다. 그러다가 빗방울 하나가 떨어지면서 다시 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아이들은 탄식의 한숨을 내쉰다. 7년 동안 비가 내리면 아이들은 태양을 담아냈던 눈동자로 시간을 되새기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살고 있는 이곳은 금성이다.
<온 여름을 이 하루에> 외에도 미래에 사는 아이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1928년에 도착했다가 느끼게 되는 인간에 대한 감정을 그린 <그대의 시간여행>, 집안에서 똑같은 채널의 미디어만 보느라 더 이상 산책을 하는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 홀로 산책하는 사람의 고독을 그린 <고독한 산책자>, 실제로는 43년 전에 태어났지만 열두 살에서 멈춘 채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소년의 작별인사를 그린 <어서 와, 잘 가>, 아이스크림을 사 오던 소녀가 땅속에 묻힌 여자의 비명소리를 듣게 되는 <비명 지르는 여자>, 문명이 인류를 파괴했다고 믿기에 모든 문명적인 것을 증오하는 미래에서 소년이 그림 속 미소의 조각의 온기를 이야기한 <미소>, 화성에 새로운 거주지를 만들며 살아가던 지구인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동안 자신들의 정체성마저 잃어가는 모습을 그린 <검은 얼굴, 금빛 눈동자 등도 기억에 남는다.
여름을 삼킨 비가 지칠 줄 모르고 내리는 이 여름, 7년에 단 두 시간만 태양이 떠오르는 금성에 사는 아이들의 눈동자에 비친 태양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할지 알 수 없지만 태양을 한 번도 본 적 없이 상상만 하던 때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세상을 전부 살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금화'를 상상하던 아이들이 담은 태양은 이제 어떤 모습일까.
나는 매일 학교가 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더라. 누가 학교 정문 밖으로 꽃다발을 던지는 것 같아. 어떤 느낌이니, 윌리? 영원히 젊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화폐 주조소에서 갓 찍어낸 반짝거리는 은화처럼 보이는 건 어떤 기분이니? 행복하니?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괜찮은 거니?
-<어서 와, 잘 가> 중-
달빛 아래 온 세상이 잠들어 있었다.
소년의 손에는 '미소'가 있었다.
그는 한밤중 하늘에서 내려온 하얀 빛 속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여러 차례 조용히 속으로 말했다. 미소야, 사랑스러운 미소.